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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성경지명 강해

 

                                            성경지명(59):앗달리아와 버가

                                                                                                                                                    사도행전 14:23~28

길리기아, 밤빌리아 / 앗달리아, 바보

 

                 광범위 지역: 길리기아 - 밤빌리아 - 루기아 - 아시아 - 무시아 -비두니아-본도

                                               (가운데; 브루기아 - 비시디아 - 갈라디아 - 갑바도기아)

1.밤빌리아(Παμφυλία,Pamphylia)

  ➀루기아와 길리기아 사이 / 토로스 산맥과 지중해 사이

    ○동서 120km, 남북 48km의 평야

  ➁밤빌리아는 「도리아 부족」 중의 하나인 부족 이름이다.

      (※ 「도리아 인」? 그리스 산악 지대에 살고 있던 민족으로

                   펠레폰네소스 반도 - 크레타를 거쳐 터어키 남쪽 지방으로 이주하게 된 부족.)

    ○역사적 자료로는 로마의 폼페이우스가 점령(Bc 67년) 하기 전까지

                                                    「밤빌리아인」은 토착인과 혼혈로 대부분은 해적으로 활동했다.

    ○고대의 자료는 말라리아가 많이 발생한 지역으로 나온다.(기후적)

 ➂성경에서의 밤빌리아

    ○예수님이 승천하고 난 뒤의 오순절 때 밤빌리아의 유대인들도 예루살렘에 많이 왔었다.(행2:10)

                   이 오순절 때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이 그들이 살고 있는 지방의 언어로 방언하는 것을 들었다.

    ○1차 전도여행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 지역에 속한

                                                앗달이아와 버가를 지나 토로스 산맥 하단을 넘어 비시디아 지방으로 갔다.

       - 귀로에도 다시 밤빌리아를 지나왔다.

    ○바울이 로마로 재판 받으로 가는 과정이 완전한 완행(?) 배를 타고 가는데 이곳도 지나간다.

       - 행전 27장; 아드라뭇데노 배/ 시돈 -구브로 해안 -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바다 -루기아의 무라市/

                        무라에서 「알렉산드리아 배」(곡물선)로 바꾸어 타고 「그레데」로 건너간다.

                                (시돈에서 무라까지는 약 15일 정도 걸렸다.)

2.앗달리아

  ➀앗달리아(Αττάλεια(Attaleia)=안탈로스의 성읍)

    ○현 안탈리아

    ○당시는 밤빌리아의 주 성읍.

    ○소아시아 베르가마(페르가몬=「버가모」)의 앗탈루스2세(BC 159~138년)가 설립하여 그의 이름을 붙였다.

  ➁성경과 앗달리아

    ○사도 바울의 1차 전도여행지로 지나가고 복귀하는 경유지였지만 복음을 전한 구체적인 것은 없다.

       - 가는 과정에서는 아예 앗달이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행13:13)

       - 돌아오는 과정?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행14:24~26)

3.버가(Περγη, Perga)「망대」

  ➀지중해로 흘러드는 현 Aksu 강 하구 12km 내륙으로 항구.

    ○현; 무르타나((Murtana)

    ○「아르테미스」를 섬기고 있었고,, 토착민적 요소가 강하여 복음을 전하기 어려웠다.

  ➁성경과 버가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시 통과 지점

    ○마가 요한이 여기까지 왔다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가 버렸다.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13:13)

        ⇨ 구브로 살라미도 아니고, 수리아 안디옥도 아닌 어머니가 있는 예루살렘으로...

      - 마가 요한은 바나바의 생질, 1차 전도여행 중 구브로의 「살라미」에서 수행원으로 동참.

          행 13: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수종자)으로 두었더라”

                               (살라미 - 바보 - 앗달리아 - 버가)

        / 이 만남 이전에 이미 바울과 마가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

          ! 글라우디오 때의 예루살렘 흉년 때에 수리아 안디옥교회에 있던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부조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수리아 안디옥으로 갔다.

               (마가는 이 안디옥에서 1차 전도 여행 중에 바보로 먼저 가 있은 것 같다...)

    - 마가 요한?

        / 마가는 헬라식, 요한은 히브리식 이름의 혼합

        / 어머니 마리아(행12자의 기도처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바나바의 생질.

        /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12 제자에는 들지 못함.(막 14:51의 베홑이불을 던지고..)

        / 버가에서 돌아가 버리므로 바울에게 신뢰를 잃었지만 약 10년 후에는 바울과 함께 감옥에도 갇힘.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11)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 4:10)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 1:24)

        / 이스라엘 역사가 유세비유스는 베드로의 통역자였다고 함(유세비우스 역사 3권)

        / 사도 바울 순교 후 마가는 알렉산드리아에 와서 복음을 전했다.

                (이집트 콥틱교의 시작, 68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말에 끌려가다 절명)

                (알렉산드리아 마가교회 유해가 지금도 있음)

  ○왜 돌아 갔는가?

  ○복음의 영향?

      - 바울에게 복음의 일꾼으로서 신뢰성을 잃게 되었다.

      - 2차 전도 여행의 시작에 바나바와 다툼의 계기가 되었다.(행15:37~38)

          / 바울은 실라와 함께 수리아 안디옥 내륙 ~ 길리기아

          /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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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이사야서 강해

 

     이사야(30-2):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 그를 기다리는 자 마다 복이 있도다

                                                                                                                                        이사야 30:18~22

     1~17절? - 애굽에 피하는 것이 수치, 수욕이 될 것, 그럼에도 애굽에 피할 것이고

                                  선지자들에게는 선견하지 말라고 하고, 말을 업신여기고 허망을 믿고 의지한다.

                「너희들은 무너지려고 불쑥 나와 있는 담과 같다.」

     그래서 하나님이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어 버리듯이 깨어 버려 물 한 방울도 뜨지

                                       못하는 그릇조각으로 만들어 버리고 산 꼭대기의 깃발 같이 희소하게 하겠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진노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사랑, 구속이 있다.

                 (이런 심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1.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➀3:13에서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려고 일어서신다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3:13)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 백성을 짓밟고, 맷돌질 했다.

    ○타락의 길로 가는 사람들, 여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 그들의 장식, 향수를 벌거벗겨 수치로 대신 할 것이고, 썩은 냄새가 향기 대신 하게 하겠다.

  ➁그러나 지금은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기다리시고 일어나신다.

    ○「은혜 주시기 위해서」

       - 「은혜 주시기 위함」은 원래 하나님이 가지신 구원의 속성이다.

          / 하나님은 아합에게도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은혜를 주실려고 했고, 주셨다.

          / 하나님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전멸의 심판을 생각하기도 하였지만 또 은혜를 주신다.

          / 사사 시대 이웃 나라를 통해 고통 받게 하시지만 은혜 주시기 위해 사사를 부르신다.

          / 주님은 가룟 유다의 마음을 아시고 돌이키게 하시고자 하신다....(이미 돈은 받은 상태)

      - 주님은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범죄하고 타락하였지만.. 심판을 미루고..)

   ○「기다리신다」

       -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주님은 주님 품으로, 말씀으로 돌아오기를.....

       - 주님이 「기다리고 있는 이 시간」 이 우리에게는 은혜다.

          / 이 시간을 빨리 깨닫는 자, 인식하는 자가 되어야.......

       - 주님은 기다리시는데 주님이 심판하시는 그 시간까지 기다리신다.(기다림의 끝=심판)

            (주님은 주님 자신이 행하실 심판의 때(시간)를 아심으로 그 때까지 기다리신다.)

            (사람의 세상에서는 기다림의 시간 뒤에 얼마가 될지 모르는 공간의 시간이 있게 된다.)

                Vs 그러나 주님의 기다림은 최고의 maximum 의 시간이 된다......

                             주님의 이 한계치가 넘어가는 그 순간이 곧 심판이 되어 버린다.

    ○「대저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시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 하나님의 정의는 완벽한 정의이다. 그래서 누구도 항거할 수 없다.

          / 이미 주님의 한계치의 기다림이 있은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다.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참을 만큼 참았다.)

          / 그 한계치의 기다림에서 믿음과 불신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하신다.

            ! 이 시간에 더 악할 자들은 더 악해지고, 돌아설 자들은 주님께로 돌아선다.

             (30장 앞 부분의 사람들?

                    / 바른 것 보이지 말아라, 부드러운 말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 바른 길을 버리고 첩경에서 돌이키라, 하나님을 우리 앞에서 떠나게 하라...

                       그래서 결국 무너지기 직전의 불쑥 나와 있는 담과 같이 되는 한계점이 왔다....)

       - 기다리시는 여호와를 기다리는 성도! ⇨ 그들은 복이 있다.

          / 궁극적으로 우리는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다림 속에 있으면서

                             주님이 말씀하신 재림의 약속을 기다리는 마라나타 신앙의 성도들이다....

          / 말씀하신 것을 기다리며 기도하는 다니엘(단 9장)

          / 말씀하신 것을 기다리며 가나안 땅으로 나가며, 가나안을 점령하는 여호수아!

  ➂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런 자들이 「시온에 거주하며 예루살렘에 거주한다.」 Vs 애굽의 그늘에 피하지 않고....

       - 불신의 사람들은 애굽과 맹약하고, 애굽 「소안」 「하네스」로 내려갔지만.....

          / 시온에 있는 것이 더 위험스럽고, 불안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머물고 있는 자들...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 볼 것이라고 짐승들에 짐을 지우고 네겝 사막을 지나 애굽으로 간다. 6절)

    ○너는 다시는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라.

      - 여기서? 「백성아」(복수) 해 놓고 「너는」 이라는 단수로 말씀하고 있다....

          / 단수 처럼의 소수 (=산 꼭대기의 깃대, 산마루의 기치; 17절)

      - Vs 통곡하는 것을 피해 애굽의 그늘로 들어간 자들은 통곡할 것이고....

    ○이들은 예루살렘에 남아서 통곡할 것이다. - 그러나 통곡하지 않을 것이다.(19절)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 예루살렘에 남아서 통곡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고 응답하실 것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시 30:11)

           Vs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웃음으로 내려가겠지만 통고하게 될 것이다.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기는 하겠지만 네 눈이 스승을 볼 것이다.

       - 말씀을 따라 살고 있는 자의 고통, 믿음으로 살고 있는 자의 고통....

       - 「네 눈이 스승을 볼 것?」

          / 이들을 가르치고 말씀으로 인도하는 선견자, 선지자들..!!!

               Vs 불신의 사람들은 이 스승들을 보고 10~11절에서?.....

       -이 스승(선견자, 선지자)들이 말할 것이다.

           「너희가 오른 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 예루살렘에 남아 있지만 방황하게 될 것이지만 가르쳐 주신다.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

           ! 이미 모든 백성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가르쳐주셨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다.

           ! Vs 그렇지만 남아 있는 자들은 이 소리도 듣고 순종할 것이다.

           ! 이들이 남아 있다는 그 자체가 「바른 길」이다.

           !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그 바른 길 속에 - 더 세미한 (예루살렘 속에서) 가르침과 인도하심

             (큰 틀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져라 - 믿음에 들어왔을 때 또 가르침 - 그 속에서 또 가르침)

    ○남은 자들의 믿음의 결단력의 신앙모습?

       - 자기들이 조각하고 만들고, 금은을 입힌 우상을 더럽게 하는 결단력...

                귀중하고 귀중히 여기던 것, 그것에게 굴복하고 굴종하는 것, 매일 딲고 깨끗하게 하던 것.

                     ⇨ 이것을 더럽게 해 버리는 결단력

             “그들이 그 화려한 장식으로 인하여 교만을 품었고 또 그것으로 가증한 우상과

                          미운 물건을 지었은즉 내가 그것으로 그들에게 오예물이 되게 하여”(겔 7:20)(개역)

      - 「불결한 물건을 던짐 같이 던지며 이르기를 나가라 하리라」

          ⇨ 우상과 완전한 결별 - 던져버림 Vs 한 때는 최고로 가까이 하며 아끼고 의지하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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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성경지명 강해

 

                                                         성경지명(58):길리기아 다소

                                                                                                                                               사도행전 9:26~30

1.길리기아((Κιλικία, Cilicia)

  ➀이름의 뜻: 돌을 굴리다.

      ○내륙 지역은 토로스 산맥의 기묘한 바위들과 고원지대와 자연 계곡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➁아나톨리아 반도(터어키)의 광범위 11지역 중 하나(동남)

     -토로스(타우루스) 산맥 남부 : 루기아 - 밤빌리아 - 길리기아

     -토로스(타우루스) 서부 : 아시아

     -토로스(타우루스) 산맥 북쪽 고원 : 브루기아 - 비시디아 - 갈라디아 - 갑바도기아

       (※ 비시디아+갈라디아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루가오니아인들이었다.)

         “그들이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행 14:6)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행 14:11)

      -흑해 해안 : 무시아 - 비두니아 - 본도

  ➂길리기아의 변천?

   ○힛타이트인들은 길리기아를 키주와타(Kizzwatha),

                 앗수르는 갈락구(Khalakku)라고 불려진데서 헬라어로 길리기아(Κιλικία)가 나왔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셀류코스 왕조에 속했다가 Bc 57년 로마에 부속되었다.

           (※ 카산드 왕국 - 리쉬마코스 왕국 - 셀류코스 왕국 - 프톨레미 왕국)

  ➃스테반의 복음 증거에 논쟁을 건 사람들 중에는

                                          길리기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와서 회당을 세운 사람들도 있었다.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행 6:9)

     ○이들은 디아스포로 유대인으로서 귀환하여 믿음을 지킨 상당한 자존심이 있은 것 같다.

  ➄사도행전 15장에서 1차 전도여행 후 보고에서 이방인들의 믿음에 할례 문제 회의?

       결과; -하나님은 그들이나 우리나 구원에서 차별하지 않으신다.(행 15:9)

           -그들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행 15:11)

           -그러므로 우상의 더러운 것, 음행,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짐을 지우지 말라( 행 15:19)

              그리고 편지를 쓰서 보내는데?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 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행 15:23)

        ?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지역?

           구브로(살라미, 바보) - 앗달리아- 버가- 안디옥(비디디아) -이고니온 - 루스드라 - (리턴)

                 편지를 보낼려고 하면 이런 지역에 보내야 하는데 이런 지역에 보내지 않고?

          「안디옥과 수리아」는 바울과 바나바를 파송한 곳.

           「길리기아」는 아직 공식적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 - 이것으로 볼 때

           「길리기아」는 바울이 회심하고 사도들이 받아 주지 않을 때 고향 「다소」에 가 있었는데

                       그 때 바울이(사울) 길리기아에서 복음을 혼자서 전한 것으로 추정...(행 9:30,갈 1:21)

               (이렇게 있을 때 수리아 안디옥에 왔었던 바나바가 「다소」에 가서 바울을 데리고 왔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행11:25~26)

2.다소(Ταρσός, Tarsus)

  ➀이름의 뜻: 「기쁨」

       ○「타르사」 - 「다소」 - 현; 타르수스

       ○지중해 해안 16km 내륙에 위치하고 당시에 길리기아의 수도

  ➁특징:

       ○아마, 천막용 염소털, 모직물 등의 특산물과 린네르 직조나 천막제조등의 수공업이 발달했다.

             (린네르(linen): 아마(亞麻) 실로 짠 얇은 직물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행 18:3)

                  (고린도에서 본토 출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났을 때 - 로마에서 옴)

  ➂사도 바울의 출신지

      ○사도 바울의 육적 자존심?

           길리기아 다소 출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 나면서부터 가진 로마 시민권 / 가말리엘 문하생./

                          율법으로는 완전한 자.

             “바울이 이르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시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행 21:39)

                   Vs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육적 자존심이었던 것을?

          - 이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8)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부터 난 의라”(빌 3:9)

         - 이것들을 복음의 도구가 되게 만들었다.

            / 고향 길리기아 지역과 다소를 - 복음 전하는 장소로

            /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율법으로 완전한 자 - 율법을 복음의 해석 길로

            / 나면서부터 가진 로마 시민권 - 가이사에게 호소하고 로마로 복음 전하러 가는 도구.

    ○「다소의 복음」은 ⇨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공식으로 나타난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행 15:41)

         - 수리아는 몰라도 길리기아에도 이미 교회들은 있었다는 것....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 ? 수리아 안디옥 - 피에리아 산맥을 넘어 - 이스칸데룬 - 해안을 따라(or 항해?) - 길리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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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주일 예배 설교문

 

                              기도 -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태복음 26:36~41

     오늘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 마태복음 26:41 / 막 14:38 / 눅 22:46 동행구절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밤의 감람산 게셋마네 동산의 기도.

             성경에서 사탄은 참소하는 자! 시험하는 자라고 한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금식 기도 후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마 4:3)....

                        - 기도하지 못하게, 기도하지 않게, 기도할 필요가 없게....

   시험하는 이유? 믿음에서 떨어지게,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에서, 교회에서, 천국을 바라봄에서...

   사탄은 아담 이후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 성도들에게 다가와서 시험한다.

            아담과 하와를/ 노아를/ 아브라함을/ 야곱을/

                                                     모세를/ 아론을/ 다윗을/ 예수님을/ 제자들을...........

       이런 분들을 시험한다고 하면? 우리와 같은 이야 당연히......!!!!

                 이런 분들이 순간 넘어진다고 하면?(넘어졌다고 하면?) 우리는?....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의 시점에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했다고 하면?

    오늘은 공생애 마지막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장면이다.

              공생애 처음의 기도와 비교를 해 보면?

                                                그래도 그 때 보다는 훨씬 든든하다......

                - 주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는 혼자였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다...

                                                         같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자들이 있다... )

                         이들은 3년 동안 주님께서 가르치시고, 함께한 제자들이다.

           이 제자들에게 게세마네에 오기 조금 전

                    -유월절 만찬 때 그들에 잔을 들어 따라 주셨고,

                    -떡을 떼어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 수건을 두르시고 그들의 발을 하나하나 씻어 준 제자들이다.

       그리고 이 제자들 중 가장 믿을 만한 제자 3명을 데리고 따로 기도하러 가신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다른 제자들에게는 ⇨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신다.

                          (안,빌,바,도,마,야,다,시)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않아 있으라」

                   너희들은 좀 쉬어도 돼! 너희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돼(?)

                                       너희들은 오지 않아도 돼(?)

       그렇지만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은 너희들은 따로 따라와...... 말씀하신다.

                    「데리고 가실 새」 -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적어도 이 세 사람은 이 날 밤 주님의 기도에 함께 해야 할 제자들!!!

                 - 적어도 이 세 사람은 이 날 밤 주님의 깨어 있음에 함께 깨어 있어야..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Vs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 아! 주님이 우리들만 데리고 와서 이렇게 하시는 것 보니

                    우리도 기도해야겠구나!!!!

                            왜 다 데려 오시지 우리 3명만 데려 왔을까?

                  ☞ 저번에도 주님이 우리 세 사람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시더니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셨어!!!!(마17:2)

                      (그 때 주님은 변화산(헷틴산)에서 변형된 모습으로,

                          완전히 육신을 벗어나신 주님의 모습으로

                              엘리야, 모세와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어!!!

                                   그 때 우리가 얼마나 감동했었어?...... 베드로 너는 그 때

                                              초막을 셋을 지어 여기서 삽시다 고 까지 했었지......

               이번에도 무슨 이유가 있을거야! (우리 셋을 따로 데리고 온 것은!!...)

       그러데 주님의 말씀이 좀 이상해..........

               그냥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하신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이다...

     왜 주님이? 무슨 일이 있길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는지.......

                -주님께서 지금까지 저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주님께서 지금까지 항상 당당하셨지 저렇게 힘들어 하시는 적은 없었어.....

                    (바리새인들 앞에서, 서기관들(화 있을진저~), 대제사장들 앞에서,

                                성전의 많은 장사꾼들과 사람들 앞에서...)

         Vs 그런데 「고민하시고 슬퍼하셔」 심지어 「죽게 되었으니」 라고까지 하셔...

                그리고 우릴 데리고 오셨어!!

                그리고 주님은 저렇게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고 계셔.....

            이쯤 되면 제자들이(이 3 사람이) 보는 눈, 느끼는 눈이 있어야 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왜? 인지는 모르지만...

                        -지금 주님은 고민하여 죽게 된 일이 있어.....

                        -주님 마져도 저렇게 기도해야 되는 일이 있어....

                     주님이 오죽했으면 우리에게 「나와 함께 깨어 있어 달라고 하겠어?!!」

                           - 지금까지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한 번도 없었어...

                       Vs 오히려 우리가 주님께 부탁을 했고, 주님께 달려 왔지....

                      ⇨ 그래서 우리는 모르지만 기도해야 돼.....

                     주님에게 힘을 달라고, 주님의 이 문제가 해결 되게 해 달라고..

                                   주님의 고민이, 주님의 죽게 된,

                                               주님이 슬퍼하게 된 것들이 해결되게 해 달라고....

 제자들의 입장?

             주님이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니

     - 제자들은 지금 깨어 기도해 할 때다.(자기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지금 제자들은 이 때가 기도해야 될 때라는 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지금 이 때가 주님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이 날 밤이 얼마나 중요한 밤! 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음이다....

            지금의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위급한 시간인지......

            지금이 자다가 깨어 기도해야 할 시간이라는 것을 모른다....

    ☞ 이 밤이 그들이 주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할 밤이란 것을......

                     이 밤이 두르고 있던 겉옷을 버리기까지 하면 도망할 것이란 것을...

      주님도 이 시간에 깨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원 뜻(오신 뜻)과는 다르게 십자가를 지지 않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주님도 이 때 육신의 뜻은? -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이다.

                   주님도 이 때 기도하지 않으면? -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가 되지 못한다.

      -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주님도.....

              (죽은 자를 살리고, 나면서부터 소경, 앉은뱅이인 사람을 고치고,

                  바람과 풍랑을 꾸짖어 잠잠하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하늘의 12영 되는 천사를 호령할 수 있는 주님이신데도.......)

               이 때 깨어 있지 않는다면, 기도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피하고자 하는 내 뜻대로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베드로? 「모두 주를 벌릴 찌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4)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

                    고 장담하고, 다짐하고, 결심하고, 확신하고, 선포하지만........

                 지금 제자들은 주님이 땅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듯이

                                 그들도 이렇게 기도해야 할 시간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우리는 주님과 함께 깨어 있어야 한다....

                           주님은 깨어 기도하시는데 - 제자들을 존다.

                           주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주님은 말씀하신다.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우리의 육신은 절대로 질 것 같지 않다, 시험 들지 않을 것 같다...

                     우리의 마음은 (생각은) 절대로 넘어질 것 같지 않다. 허물어지지 않을 것 같다.

                            그러나 「약하도다」 이다.

       주님도 이 「약하도다」를 이기기 위해서 기도했고,

                                   아버지의 뜻대로를 이루어 십자가를 지신다.....

                    주님은 지금도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않고 우릴 위해 기도.(시 121:4)

                       여기에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주님과 함께 기도하는 교회 성도들이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는 승리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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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이사야서 강해

 

    이사야(30-1):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

                                                                                                                      이사야 30:1~17

1.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세상(애굽)을 의지하여 맹약을 맺는 자들.

  ➀패역한 자식들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거절) 애굽과 맹약을 맺는 자들.

    ○이 맹약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는 것.(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이 아닌 완전 반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맹약도 있다...)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1)

    ○애굽과 맹약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보다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 더 믿음직하다고 보기에...

       -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다른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그들의 멸망을 의미한다.

          /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애굽과 언약을 맺는 자들에게 「화 있을진저」가 자동으로 연결.

         ☞ 열왕기상 17:1~5

                  북이스라엘 호세아 임금 때 앗수르왕 살만에셀이 침공하게 되므로 조공을 주게 된다.

                         (= 남유다 아하스 12년(Bc 724년) / 살만에셀 -사르곤 -산헤립 -에살앗돈 -오스납발)

                   호세아는 애굽왕 소(사바콘(Bc 726~714)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앗수르에게 조공 중지.

                     이에 앗수르 사르곤Ⅱ세(Bc 721~705)는 즉위년에 사마리아를 침공하여 점령(Bc 721)

                       이 때 유다? 아하스와 히스기야 때.

                            히스기야는 앗수르왕을 배반하였지만 애굽을 의지하지는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게 하시매 그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반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은 히스기야 16년이다.)(왕하 18:10)

    ○「패역한 자식들」?

       -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 사이에서의 「패역한 자식들」은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다.(신21:18~21)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21)

       - Vs 하물며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패역한 자식들」이란 소리를 듣는 자들....??

    ○「죄에 죄를 더하도다」

       - 그들의 삶에서 일반적으로 짓는 죄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데도 의지하는 죄.

  ➁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는 자들

    ○하나님의 세력 안에서 Vs 바로의 세력 안에서..

    ○애굽의 그늘 Vs 하나님의 그늘.

       - 애굽의 그늘 ⇨ 과연 바로의 마음, 애굽의 군사, 애굽의 무기를 믿을 수 있는 것인가?

       - 주의 그늘 ⇨ 주의 날개 그늘(시57:1, 시17:8)/ 내 손의 그늘(사51:16, 사49:2)/바위그늘(사 32:2)

    ○「애굽으로 내려 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여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묻지 않았다.

           /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의 생각 독단으로 행하는 모든 것은 죄이다..

           / 설령 하나님의 뜻(말씀)하고 같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➂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이미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20장에서 애굽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면서 애굽과 구스에 대한 징조와 예표)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이와 같이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끌려 갈 것이다.(사 20:4)

       -그들(이스라엘)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놀라고 부끄러워 할 것이다.

       - 주위 나라들이 「우리가 믿던 나라,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할 것.(사 20:6)

    ○이렇게 말씀을 주셨지만 백성들은 애굽의 세력, 애굽의 그늘을 의지 하려고 한다...

   ※ ☞ 다행히 「히스기야 임금」은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의지...

           후의 임금들은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애굽을 의지......피함....

                 “너희가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가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에서 죽을 것이라” (렘 42:16)

                "내가 또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을

                                    처단하리니 그들이 다 멸망하여 애굽 땅에서 엎드러질 것이라~~”(렘44:12)

2.네겝 짐승들에 대한 경고라(개역성경: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라)

    네겝=네게브(건조한 땅)

      ○보통명사로 남(南)을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남방」(신1:7, 34:3, 수10:40. 렘17:26 32:44..)

        -헤브론 이남 지역⇨브엘세바, 시글락, 아랏, 브엘라헤로이 등 「시므온」 지파가 분배.

  ➀네게브 짐승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으로 보내는 예물을 잔뜩 지고 가는 짐승들의(낙타, 나귀) 모습.

    ○이들은 애굽에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광야의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간다.

             (암사자, 수사자, 독사,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

       - 이렇게 위험을 무릎서고 도움을 구하려 가지만 애굽은 「그들에게 무익한 민족」이 될 것이다.

       - 애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갈대 지팡이」에 불과하다.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애굽 왕 바로는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사 36:6)

            “애굽의 모든 주민이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애굽은 본래 이스라엘 족속에게 갈대 지팡이라”(겔 29:6)

           ⇨ 갈대 지팡이인지 나무 지팡이이진지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

                (나무 지팡이로 보이는 애굽, / 반석으로 보이는 모래.... 참으로 보이는 거짓선지자)

  ➁애굽은 가만히 앉은 라합

    ○하나님을 대적하는 애굽을 지칭할 때 자주 쓰는 말(욥9:13, 26:12, 시 87:4, 사 51:9...)

3.하나님의 심판

  ➀하나님의 확실함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을 증거로, 증명으로 남겨 놓으려 하심.

       - 분명히 들려주었어!!! 분명히 기록해 놓았어!!! - 뒤에 딴말 하지 마...!!!!

    ○백성들의 타락과 교만.

       - 선견자들에게 ⇨ 선견하지 말라/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 오히려 선견자들에게 ⇨ 바른 길을 버리고 첩경에서 떠나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거짓, 불신앙이 합리화되어지기 때문이다...)

  ➁하나님의 경고

    ○이렇게 하는 너희의 죄악이?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이 되리라」(13)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하겠다. - 깨어진 조각으로 물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조용히만 있어도 될 것을? 하나님께 대꾸를 한다...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도망하면 되지....) Vs 그러나 너희를 쫓는 자들이 더 빠를 것.

       - 한 사람이 꾸짖으면 천 사람이 도망할 것이다.

       - 남는 자는 겨우 산 꼭대기의 깃대 같을 것이다. (겨우 한 두 사람???)

              ☞ 그러나 이런 심판, 하나님의 진노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18절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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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주일예배 설교문

 

                          스가랴서의 「그 날에」(8):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스가랴 14:9~11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스가랴서의 그 날에 ? - 성전 재건, 예배 회복...

          ➀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➁너희가 각각 서로 초대하리라.(무화과나무, 포도나무 아래로..)

          ➂내가 돌아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하리니

          ➃우리가 너희와 함께 가려 하노라. (10사람이 옷자락을 붙잡고)

          ➄그들의 왕관이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서 빛나리로다.

          ➅약한 자가 다윗 같겠고 다윗 족속은 하나님, 무리는 여호와 사자.

           ➆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리라 - 겔47장과 연결 - 아라바도..

            스가랴, 학개 선지자는 1차 포로귀환으로 돌아온 백성들이

                          낙심하고 힘겨워 하고 있을 때 성전재건, 예배 회복에 대한 신앙 독려, 격려...

      신앙회복, 예배 회복, 성전회복을 온전히 이루면? 주실 하나님의 은혜들...

             오늘 8번째 마지막 시간?

                           ⇨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1.1~7에서 사탄의 마지막 발악이 있다.

    그러나 3절에서 말씀한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已往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이왕(已往)」:이미 정해진 사실로서 어쩔 수 없게 된 바에(부사)

            하나님께서 보실 때 그렇지 않아도 멸절, 멸망시킬려고 하고 있는 차에...

                 그들이 더 빨리 죽으려고, 멸망하려고, 예루살렘을 침범하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이왕에 잘되었다」 ⇨ 이참에 멸망을 시키자!!!!!

                      그래서 여호와께서 나가서 싸우신다... - 완전한 승리를 이루신다.

      이 완전한 승리는 계시록 17장에서 마무리되어진다.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계 17:14)

            ⇨ 그리고 대적하던 이들을 영원한 불못으로 던져 버린다.

  오늘 본문 앞의 말씀에도 주님이 그들을 대적함으로 그들은?

          웃시야 임금 때의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고 하신다.

              ⇨ 지진을 피하여 도망가는 그들의 모습? ⇨ 다급함 / 항거불가 /

                   하나님께는 항거 불가다. ⇨ 천하의 누구라도 / 세상의 그 어떤 권세자도...

                   항거불가들이 될 것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덤비는 자들이 있다는 것...

                                   (물론 덤빌 그 때는 모르겠지만....)

            그 덤비는 것이 그들의 종말이 될 것인 줄을 모르고.....

                            그렇지 않아도 그들을 심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스스로 그들의 종말을 앞 당기는 자들.......

2.그 날에 여호와께서 천하의 홀로이신 왕이 되신다.

     최종 승리를 하신 여호와께서 천하의 홀로이신 왕이되신다.

                  홀로 찬양 받으실 하나님! 홀로 예배 받으실 하나님!

                  홀로 경배 받으실 하나님!

      원래 왕은 이름이 없다. - 홀로 한 분이기 때문이다.

                 (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

                    (바로가 그의 이름이다. 아비멜렉이 그의 이름이다.

                       전하(殿下) 폐하(폐하)가 그의 이름이다. 세종 전하, 세종페하가 없다.)

                          그것은 앞에 임금들이 있었고, 뒤의 임금들이 있을 것이니 붙여진

                                이름이고, 그 임금이 살아 있는 당시는 그 이름이 있으되 이름이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이다...... 다른 신의 이름이 있을 수 없다...

             다른 많은 신들의 이름 중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끼여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 ⇨ 앞에서도, 지금도, 미래에도.......

        하나님의 이름이 다른 이름과 구별되게 불려야 할 일이 없을 것...

                  하나님의 이름 하나만 존재하고, 그 이름 하나만 영원할 것이기 때문...

2.그 날에 「온 땅이 아라바와 같이 된다. 」

   지난 시간의 설교와 연결

                 아라바 바다 = 사해

       에스겔 47장: 성전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 - 발목- 허리 - 헤엄

                  ⇨ 아라바로 흘러 들어가 고기, 생물들이 살고. ⇨ 「어부들이 설 것이라」

              아라바? ⇨ 죽음의 땅/ 죽음의 바다/ 죽음의 물 / 생물 하나 살 수 없는 곳(물)

                                  도저히 회복 될 것 같지 않는 바다 / 회복 불가능의 곳.......

                                      하나님은 이 바다를, 이 물을 회복시킬 것이다.....

          -도저히 회복되지 못하고, 회복시킬 수 없는 나면서? - 소경, 앉은뱅이

          -도저히 회복되지 못하고, 회복시킬 수 없는?

                     38년 된 베데스다 연못 환자/ 12년 혈루증, / 흉악히 귀신 들린

                          죽어 무덤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간질로 불에도, 물에도 넘어지는...

              ⇨ 하나님은 400년의 애굽의 종살이, 70년의 바벨론 포로에서.....

                    그 바다가 다시 풍성해진다. - 생명의 바다로 변한다....

3.사람이 그 가운데에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아픔이 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 하나님의 만족..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만족하시지 얼마나 좋았겠나...)

         -아담까지 다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리고 사람에게는 더 축복을 주셔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한 것을 다스리게 하시는 축복을 더하여 주셨다.

            Vs 그런데 하나님은 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심히 좋았더라 」 한 것을

                       저주해야 만 하는 아픔이 있다.(인간의 타락 때문이다... )

                아담과 하와를 저주해야 할 뿐만이 아니라...

                   땅도 저주를 받아 엉컹퀴가 나게/ 동식물도 저주를 받아야 했다...

                        마침내 홍수로 쓸어버리는 저주를 실행해야만 하는 하나님의 아픔!

   -노아 - 홍수로 구원 받았지만... ⇨ 그의 5대손 벨렉이 태어날 때...

           언어를 혼잡게 하고 세상을 나누어야 하는 저주의 심판을 해야만......

                  같이 모여 살게 해서는 안 되는? - 모이면 더 타락하는.....

   -사울을 축복하고 임금이 되게 하셨지만 그를 저주하고 포기해야만....

  - 예루살렘 ⇨ 영원까지, 여호와의 눈, 처음부터 지정하신 곳......

                  이런 예루살렘을 저주하고 포기하고, 무너지게 놔두야 했던 하나님!

   - 주님의 사역의 중심지, 최고의 은혜지였던 가버나움, 베셋다, 고라신.....

                        이 지역을 「화 있을진저」라고 하며 저주를 해야만 했더 안타까움..

원래 하나님의 속성은 축복이다. - 저주가 없다.....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지 저주의 근원이 아니다....

                 Vs 그런데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듣는다.(받는다?... )

                        불행이다.... - 원래 저주가 없는 분인데 축복만 하시는 분인데....

      // 주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축복하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분

                         주님께 나오는 자는 그 주시려 오신 축복을 받는다....

                          (건강의 축복, 물질의 축복, 진로의 축복, 평안의 축복...)

        그런데 사람들의 죄악이, 영접지 않음이 저주의 주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 심판의 주님으로 만들어 버린다...

              사람들 스스로 주님의 축복의 대상에서 저주, 심판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눅13:34)

                                   그렇지만 이제는?

       「사람이 그 가운데 살며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다시는 저주가 없을 것 - 종결이다!!!!

  왜 다시는 저주가 없을 것인가?

              예루살렘이 완전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의 제사 예배, 예루살렘의 성도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타깝지만 우리의 어리석음? 믿음과 불신의 반복이다.(믿음과 타락의 반복이다..)

        아담 이후로... 믿음으로 사는가 싶더니 불신으로.....

                              이제 믿음으로 사는가 싶더니 타락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이 반복되어지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 말씀하신다.

        「다시는 저주가 있지 아니하리니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리로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이 완전 종결의 자리에 드는 믿음의 성도들.... 교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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