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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주일오전 설교문

                                     찾아 이르되 와서 보라

                                                                                                                               요한복음 1:43~51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여러 경우?

          -세례요한의 증거로 예수를 믿게 된 사람 - 요한, 안드레.

          -예수님이 직접 부른 제자 - 빌립, 마태등 (베드로)

                  / 평범하게 부르는 정도가 아닌 강권적 역사로 부르심: 사도바울

         -먼저 믿은 성도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께 온 사람 - 베드로, 빌립....

  ☞ 나는 나를 전도하신 분을 잊을 수 없다.

       -걷지 못하던 사실상 앉은뱅이/ 피를 토하는 결핵/ 소망없는 20대초.

                   찾아오는 친구들이 없다. 대학교 다닌다는 소리. 직장 소리.....

       -아버지, 어머니 들에 일 가고 난 후 겨우 방에서 기어 나와

              축담에 앉아서 마당을 돌아다니는 병아리를 보는 것이 하루의 일.

              (병아리를 보면서 저 볼펜 심 보다도 작은 병아리들도 마당을..)

                                        저녁이 되면 내가 앉아 있는 마당이 하얗게 된다....

                   (기침으로 나오는 가래침을 하도 많이 뱉어서....)

      -그런데 우리 집에 복음이 들어왔다.....

           아무른 소망이 없는 절망의 나에게 교회를 한 번 와 보지?.... 하는 사람이 있다....

           나의 어머니에게 「병석이 총각도 교회를 한번 다녀보지?」

                   같은 지역에 살아도 알기는 알지만 안면 정도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한 젊은 30대 중반의 여자 집사님이시다......

          (그 분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아니고 완사 큰 길에서 상점.....)

                     남편은 시계를 고치고 팔고, 세탁을 한다.

                              그 여자 집사님은 세탁 수선 등 바느질을 하고 있다.

      우리 집 하고는 거의 왕래가 있을 수 없는 집이다.(세탁? 시계?)

      그 부부가 우리 집이 있는 부락의 교회 「완사제일교회」에 다니신다....

        초등학교를 다니기 전에 친구 따라 교회를 다녀보기는 했지만

                       교회가 우리 부락에 있지만 사실상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 그 자녀 가족들이 다니는 곳?..)

  아무런 소망없는 절망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그 때

 그런데 그 젊은 여집사님이 「병석이 총각도 교회를 한번 다녀보지?」

   그리고 우리 집을 찾아온다. 그 새댁에게 자녀가 3명이 있었다.

        그 때 막내는 그 새댁 집사님이 아직 업고 다니던 아가였다....

             그런데 그 어린 아가를 업고 결핵환자가 처 박혀 있는 방에 들어와서 기도를 하고 간다.

     얼마 전 그 분의 말씀: 그 때 어떻게 이 목사 집에 「세호」를 업고 갔는지 모르겠다.

                      결핵에 감염이 된다는 염려 생각은 전혀 못했다는 것...

          그 냥 저 청년을 전도하고 싶었다는 것.....

       (참고: 그 때 업혀 다닌 그 「이세호」라는 아기? 독일 피아노회사

                                  스타인웨이에 들어가서 공부하고 현 한국에서

                         한국 최초 스타인웨이 「피아노 마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1.주님이 빌립은 직접 불렀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전도하여 예수님께 데리고 온 그 다음 날...= 이튿날

          주님이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직접 「빌립」을 부르셨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빌립이? ⇨ 바로 찾아가서 전도를 한다.

                 앞의 안드레도 주님을 영접하고 난 뒤 바로 그 형제 베드로에게 전도..

                  그냥 길가다 만나서가 아닌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가서」이다.

                        찾아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면서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42)라고 했다.

  오늘 빌립도 주님의 부름을 받은 후 바로 나다나엘에게 찾아 가서 전도한다.

      - 우연히 만나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다./ 일부러 찾아갔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 안드레는 왜? 제일 먼저 베드로에게 가서 전도를 했을까?

      - 오늘 빌립은 왜? 제일 먼저 나다나엘에게 가서 전도를 했을까?

                 이유는 알 수 없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안드레에 있어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해 주고 싶은 사람이 「베드로」였고,

      -빌립에게 있어서 제일 먼저 복음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나다나엘」이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이다....

                 그것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 그렇게 살아도 별 애로가 없는...

                      그는 유대인이다. - 유대인의 믿음상? 죽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우리의 구세주로...)

                                     이제 예수님을 믿어야 될 사람이다.(구약에서 예언된...)

           빌립도 다나나엘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야 될 사람으로 알고...

                   「찾아가 이르되」

           주님도 「나다나엘」을 알고 계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데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

         주님도 「나다나엘」을 부르실려고 했는지 모른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서

                      「간사한 것이 없음을 보셨고, 참 이스라엘 사람」인 것을 보았다.

                  「참 이스라엘 사람」?

                          바울이 말하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바울이 말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이 아니다....

   나다나엘은 혈통으로, 신앙으로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

        이런 사람에게 더 무엇이 필요한가?

    그러나 이런 사람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받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예수님이 필요치 않는 사람이 없다... )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정직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이런 사람이 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그 착하게 산 것이, 사는 것이 헛되지 않아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착하게 살아 놓고, 정직하게 살아놓고 지옥가면 얼마나 억울한가?)

                 (나쁘게, 거짓으로, 포악으로 살고 지옥가면 모르겠는데..... )

       빌립은 전도를 하였지만 「나다나엘이 가지고 있는 평견이 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평견이다.

                  (나사렛도 갈릴리 지역권이다.-그러나 사마리아와 접경지역의 평견)

        -바쁘게 사는 베드로와 같은 자 데려오기 참 힘들다.

        -메시야, 구원, 천국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 데려오기 참 힘들다.

        -색안경 끼고 보는 나다나엘, 종교적, 말씀적 좀 아는 자들?

        -고정관념을 가진 자들? 데려오기 참 힘들다....

        이런 「나다나엘」 같은 자에게 그래도 빌립은? - 「찾아가서 와서 보라」라고 한다....

                       빌립은 예수님께 대한 설명은 다 했다.(유대인에게 할 수 있는 설명)

               「율법에 기록한,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병고치는 예수께 와서 보라? 말씀 잘 가르치는 예수께 와서 보라?

                     기적을 행하시는 사람 예수께 와서 보라? 가 아니다..

                     유대인이 기다리는 전형적인 메시야에 대한 말씀인 그분....

      - 이 소리에 빌립은 언쟁을 하지 않는다...

          복음은? 우리의 논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말씀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 줘도 나다나엘을 이해 못함.

            ?? 이후에 주님의 수많은 기적(표적), 말씀이 있은 후에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 고백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 주님의 공생애 초기.... (첫 기적 말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하겠나????

         ☞ 그러나 빌립은 주님에게서 분명히 메시야를 보았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았다.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안 것이 아니다.....

                               빌립 자신이 누가 가르쳐 주어서 안 것이 아니듯이?

                   「나다나엘」도 자기처럼 주님에게 와서 보면?

                              주님이 메시야 이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는 것...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에 회의적이었지만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온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

              나다나엘은 주님을 만나자 마자 고백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주님: 그래~!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스바 여왕은 솔로몬에게 와서 보고?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왕상 10: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안드레의 전도를! 빌립의 전도를 이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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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목사의 송구영신예배 설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다
                  (因我視爾爲寶 俾爾爲尊;인아시이위보, 비이위존)
 
                                                                  이사야 43:4~5, 18~21
       오늘 본문 말씀이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한다.
    2012년이 저물고 2013년이 시작되는 오늘 밤이다.
   한 해 동안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치 못하였던 것을 회개하고 용서를 빕니다.
   또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 동안 함께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돌립니다.
    왜?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존재할 수가 있었는가?
        ○광야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존재할 수가 있었는가?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앗수르를 격퇴 할 수 있었는가?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두 떼를 이루어 돌아올 수 있었으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 형님 에서의 분노를 잠재 울 수가 있었는가?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존재 할 수가 있었는가?
   ☞ 그렇다면 지난 1년 동안의 우리들은
                        과연 하나님의 은혜 없이 존재할 수 있었는가?
             지난 1년 동안 우리 대신에 여전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했던 때가 많았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대신에 여전히 채찍에 맞아야 했던 때가 많았다.
             지난 1년 동안 우리 대신에 여전히 치욕을 당해야 했던 때가 많았다.
    ⇨ 주님은 우리대신 여전히
                  수치를 당했고, 채찍에 맞았고, 치욕을 당하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 그리고 하나님은 1년 동안 또 우리들을
                         업으시고, 격려, 위로하고. 힘을 더하여 주셨다.
                         우리의 길을 이끌어 주셨고, 인도하여 주셨다.
                ○우리가 힘들 때 주님이 우리 대신 짐을 져 주셨다.
                ○우리가 괴로울 때 주님이 더 괴로워 하셨다.
                ○우리가 힘들 때 주님이 더 힘들어 하셨다.
                ○물론 우리가 기쁠 때 주님이 더 기뻐하셨다.
     주님은 왜 이렇게 하셨는가?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기」
            (因我視爾爲寶 俾爾爲尊;인아시이위보, 비이위존) 때문.
        이렇게 죄를 짓는데도 왜? 하나님의 눈에 보배롭고 존귀한가?
                      주님의 보혈로 샀기 때문이다.
         그래도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부르고」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Vs 세상의 사람들은 십자가를, 주님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자기 맘대로 사는데...
         그래도 주님을 믿고, 구주로 고백하는 그것이 하나님께는 보배롭게 보인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한결같이 주님의 눈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게」 보이는 성도들이 되고 가정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이제 우리를 이렇게 보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1.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①하나님께서 이전 일을, 옛날 일들을 잊어버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 이 은혜가 우리들에게 같이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이심으로
                                             애굽에서의 옛날 일을 완전히 잊어 버렸다.
        광야 때 까지만 하여도
               ⇨ 힘들고 어려우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오고 난 뒤에는 그 소리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다윗이 임금 되게 하심으로 임금 되기 전의 일들을 잊어버리게 했다.
         잊을 수야 있겠나 만?
                 ⇨ 그 현실 속에서는 분명 죽을 고비였고, 힘든 시간들이었는데...
         임금이 되고나니 그 한숨들, 고통의 숨 소리는? ⇨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므비보셋이라는 사람이 있다. (요나단의 아들이다.)
         그는 할아버지 사울과 아버지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할 때
                      유모가 안고 도망가다가 떨어뜨려 양 다리 불구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그 후가 더 문제다. - 다윗이 임금이 되었다.
                 다윗이 임금이 되고 사울의 후손들을 죽일까 싶어서 숨어서 산다.
                 그런데 다윗 임금이 찾는다. - 죽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다윗이 그를 왕자 중의 하나 같이 대해 준다. 왕궁에서 살게 한다.
                          (다윗은 요나단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삼하 9:13 “므비보셋이 항상 왕의 상에서 먹으므로 예루살렘에 사니라
                                                  그는 두 발을 다 절더라”
               ⇨ 므비보셋은 이제 이전 일을 기억 할 필요가 없다.
                     두려하면서 숨어 살던 그 옛날 일을 기억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 올 한 해에 하나님이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원한다.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실 것인데....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 일을 행하리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 일을 나타낼 것이라고 말씀한다.
     ☞ 올 2013년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과 가정에
                                「새 일」을 행하시는 은혜
                     「새 일」을 나타내시는 은혜가 있기를...
  그것이 무엇인가?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이다.
      ○하나님이 광야와 같은 곳에 길을 내신다.
                 도저히 길이 될 수 없는 곳,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에 길을 내신다.
             Vs 바다에 마른 길을 내시는 분이 광야에 길을 내지 못하겠나?
              요단강에 마른 길을 내시는 분이 광야에 길을 내지 못하겠나?
                      -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신 하나님이
                      - 광야에 길을 내시고 바벨론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다.
     ☞ 한 해 동안?
            가난의 포로에서, 질병의 포로에서, 불안의 포로에서, 막힘의 포로에서....
               돌아오게, 회복하시게 막고 있는 광야에 길을 내시는 은혜가 있기를....
     ○사막에 강을 내신다.
               갈증의 대명사 사막, 햇볕의 대명사 사막.....
                ⇨ 여기에 강을 내신다. 그리고 마시게 하신다. 쉬게 하신다......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20)
                            ⇨ 그래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실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롭게 길을 내 주시는 길을 걸어 주시는 생수를 마시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2013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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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성동교회 이병석 목사의 주일오전 설교문

 

                          限定의 약속을 永遠한 約束으로

                                                                                                                             여호수아 6:22~25

          오늘의 본문 말씀이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5월 가정의 달 마지막 주 설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약속을 크게 2 종류?

         ○한정적 약속: 한 부분, 한 시간, 일시적,

              - 성경상의 대부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한정적 약속과 은혜.

                   / 대부분의 치유도 한정적 은혜 - 나사로 부활, 각종 환자들 치유.

                   / 예후에 대한 약속 / 하사엘(아람) /

         ○영원한 약속: 영원한 것, 한 번의 약속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

                   / 천국, 구원, 재림/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가나안 땅 약속/ 다윗/

그런데?

         하나님의 한정적 약속을 영원한 약속으로 연결시키고 바꾸는 사람.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을 한정적 약속으로 단축시켜 버리는 사람......

오늘의 본문 여리고의 기생 라합에 대한 말씀....

      처음 라합에게 한 약속은 한정적 약속이다. 그리고 사람간의 약속이었다.

         처음은 라합과 두 정탐꾼의 약속! (수 2:12~20)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수 2:12)

                                「나의 부모와 내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수 2:13)

       ⇨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땅을

                      주실 때에는 인자하고 진실하게 너를 대우하리라」

     그리고 라합 그들을 내려준 붉은 줄을 그 줄을 증표로 약속한다.

             그들이 타고 내린 그 줄!, 그 붉은 줄!이다....

처음의 이 약속은 라합과 두 정탐꾼과의 약속이다...

      「너가 우리를 살려 주었으니 우리도 너와 너 가족을 살려 주겠다...」

           ⇨ 라합은 여리고성 멸망 때 그 줄을 자기의 창문에 메달아 늘여 놓았고,

                       여호수아는 두 정탐꾼이었던 사람에게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맹세한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내라」(6:22)

   두 정탐꾼은 그 집에 들어가서 그 집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이끌어 진영 밖에 두고 여리고성을 진멸한다.

        이것으로 라합과 정탐꾼들이 했던 약속은 완료되었다.(이로서 끝난 것..)

                    ( 살려 주어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Vs 이제 살려 주었으니 잘 사세요.... 어디가서 살 것입니까?...

                                한 번씩 연락이라도 주세요....)

   ?? 이렇게 끝나고

               이 라합과 가족들이 아이성 쪽으로, 벧엘 쪽으로,

                         멀리 간다고 저 멀리 갈릴리 북쪽으로 가서 살 수도 있다.....!!!!

                                (그렇게 그런 곳에 가서 살다가 나중에 다시 이스라엘에게 죽을 수도..)

 그런데 라합과 가족은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 떨어지지 않는다. - 오늘 말씀!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자들을 숨겼음이었더라」

   라합과 그의 가족은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

       - 이들은 함께하면서 가나안 땅이 점령당하고, 그 땅에 살던

                        그의 이웃들, 놀러가서 놀던 옆 동내들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을 본다.

       - 아이성의 사람들처럼, 벧엘의 사람들처럼,

                                   헷 사람, 아모리 사람들처럼 두려워 떨 필요가 없다.

       - 라합의 가족은 이스라엘이 누리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가족이 된다.

               (멸망의 사람들이어야 했던 사람들이 승리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으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

         이들은 끝까지 이스라엘과 분리되지 않는다....

  마침내 라합은?

    정통 유대인(정통 유다의 후손) 「살몬」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베들레헴에서 살아간다. 

            이렇게 해서 아들을 낳는데 그가 「보아스」를 낳는다.

                         (살몬 - 보아스 - 오벳 - 이새 - 다윗)

        라합은 다윗의 고조모, 그가 낳은 아들 「보아스」는 다윗의 증조부.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말?

      -라합은 한정적 약속을 영원의 약속으로 바꾸고 연결시키는 믿음....

          / 그래도(모르지만) 가나안 부족의 멋진 총각이 있지 않을까?

 여리고 멸망에서 살아남는 것으로의 약속이었지만 이 약속에서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유다에게 약속인

                    하나님의 영원의 약속에 올라탄 사람이 되었다.....

   뒤의 기브온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아이성을 점령하고 다음 차례는 「기브온」이 된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기들의 멸망을 잘 알고 있다. - 변장... - 화친 약속

     그리고 사흘 후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이들이 바로 옆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으니라”(수 9:16)

    사실상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완전히 속은 것이다....

    그렇지만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약속」을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수 9:19)

       이스라엘은 그들을 치지 않았고 그들은 여호수아와 또 약속을 한다.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여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사는 것으로」

       ?? 이들은 이제 이스라엘은 우리를 죽이지 않을 거야, 죽일 수 없어....

             이제 우리는 우리끼리 전쟁 걱정 없이 살아도 돼......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 하나님의 제단을 위하여 택하신 곳에서.. , 나무패는 일로,....

                 그들 자신과 후손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제단과

                                        영원히 연결시켜 놓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 이들도 처음의 약속으로 끝날 수 있다..... 살아남는 히위 족속으로..

        그러나 기브온 사람들도 한정적 약속을 영원의 약속으로 바꾼다....

                     이것으로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훗날 사울 임금이 왜 인지는 모르지만 「기브온」사람들을 학살을 한다.

                     ( ? 기브온의 놉의 아히멜멕 제사장 사건? -도엑 -아비아달.)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 시대에 꼼짝할 수 없었다. 항거도, 불평도....

                            그냥 억울하게 당하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억울함이 그렇게 지나간다.. 지나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나님은 이들의 억움함을 다윗 시대 때에 풀어 주신다...

                 다윗 시대 때 3년의 심각한 기근이 발생한다.....

                      이유를 모르겠다..... - 다윗이 하나님께 이 원인을 묻는다....

                하나님은 이 흉년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이유 때문이다고 한다.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삼하 21:1)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 물어 보고 확인 한 후 그들의 요구대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만 남기고 사울의 첩의 아들 2명,

                          사울의 딸 메랍의 아들 5명을 목메달아 죽이므로 해결...

                                기브온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이들은 70년의 바벨론 포로에서도 돌아와서도 성전의 잡일을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정적 치유의 사건을 영원으로 연결시키는 사람들  -  막달라 마리아등.

    한정적 치유의 사건을 한정적으로 끝내 버리는 사람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마 11:21) (눅 10:13)

       주님의 부르심을?

               -영원한 부르심으로 연결시켜 구원 받는 사람들.. ⇨ 삭개오/세리마태..

               -한 번의 부르심으로 끝내 버리는 사람들.....

                                 (사울 임금/ 가룟유다 / 데마.. )

            우리가 받은 한정적 약속을 영원의 약속으로 연결시키는 성도, 가정,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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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목사의 사무엘하 설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사무엘하 7:18,27~29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2012년 마지막 주일이다.
       마지막 주일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가지게 한다.
                      ①회개를 이루게 하고, ②감사를 이루게 한다.
           회개를 이루게 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는 것.
                                         우리가 헌신하지 못했다는 것.
                                         우리가 주신 은혜를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다는 것
                                         받은 직분을 방치하고 잘 감당하지 못한 것.
           감사를 이루게 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여기까지 이끄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시 때때로 은혜로 채우신 것.
   사도바울은 말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그리고 사도 바울 또 말했다.
           딤전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이 말을 하는 앞 절 딤전1:15에서 하는 말이 있다. 무엇인가?
              「내가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정말 그의 고백대로 바울은 복음의 괴수였다. 최고의 핍박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를 처단하지 않고 구원하셨다.
    그냥 구원하고 말은 정도가 아니라 최고의 복음 사도로 세우셨다.
      그가 「복음의 괴수」로 있을 때? ⇨ 하나님의 일체 오래 참으심이 있었다.
  그러면 바울에게만 그랬겠는가?
                         아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난 1년 동안
                 우리들에게도 일체 오래 참으심의 은혜를 더하여 주셨다.
                         아니 오히려 아껴 주셨다. 보듬어 주셨다. 지켜 주셨다.
      ⇨ 그래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고백을 해야 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이 붙어서 호흡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가 지금까지 믿음에 서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우리가 지금까지 그래도 이 만큼 살아오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 다윗이 하나님께 하는 고백이 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주 여호와의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다윗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이르되
           -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지나 온 일들을 돌이켜 보니...
           -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자기의 옛 모습을 돌아보니...
 ○나는 누구이오며 내 집은 무엇이었는가?
   다윗이 누구인가?
         - 베들레헴 한 목자에 불과한 이새의 아들이었다.
         - 아버지가 주시는 젖양 몇 마리를 키우는 이새의 막내 아들이었다.
         - 아버지와 형님들마저도 별 볼일 없게 보는 아들이었고 동생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다윗을 보셨다.
           아버지도 눈 여겨 보지 않고, 형님들도 눈 여겨 보지 않는 다윗을...
            하나님이 처음 사무엘을 다윗에게 보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있다.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삼삼16:1)고 말씀하고 있다.
         - 하나님은 이미 어린 그 다윗에게서 「왕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말씀을 하셨고,
            그를 쓰시기 시작했다.
      ⇨ 이런 것을 생각하니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다.
         - 다윗의 지금의 시점은 전체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어 있는 시점이다.
         - 그 동안 다윗에게는 감당하지 못할 어려움들이 그와 함께 했었다.
         - 수 많은 생명의 위협이 있었다.
   ☞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눈물 나는 그 과정들에 함께하여 주셨고, 지켜 주셨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를 임금으로 세우셨다.
        - 임금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나라들을 정복했다.
        - 마침내 여부스 족속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도 빼앗았다.
        -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법궤를 옮겨 놓았다.
  ☞ 지난 일들을 생각하면 꿈만 같다.
             자기는 임금이 되겠다고 발버둥을 친 적도 없다.
             저 사울이 죽어야 되는데... 라고 악담을 해 본 적도 없다.
             땅을 넓혀 대 제국을 만들어 봐야 되겠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다.
            ⇨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을 통하여 일하셨고, 승리를 주셨고.
                                       그의 생명을 보존하여 주셨다.
    그래서 다윗이 하는 감사가 이것이다.
                「내 집이 무엇이기에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그렇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을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다.
    이 2012년 마지막 주일에 오늘 다윗과 같은 감사를 하자.
                    다윗과 같은 감격을 하자....
          돌아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다」
    광야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돌아보면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던」 것처럼...
      광야의 백성들은?
        ○어디로 가야 될지를 모르는 방향성의 어려움
        ○어떤 대적, 무슨 방해꺼리를 만나게 될지를 모르는 미래 불확실성의 어려움
        ○어떤 자연 환경을 만나게 될지를 모르는 미확정성의 어려움.....
                  분명히 광야의 백성들에게 이런 것들이 닥치기는 닥쳤다.
                                      전혀 없는 것처럼 지나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그때, 그때 하나님은 그 어려움들을 지나가게 해 주셨다.
   ○ 홍해 앞에 설 때는 여기서 끝인가 싶었는데 (출발하자마자)
                            ⇨ 건너고 나면 여기까지 도우신 것이다.
   ○ 아말렉을 만나서 싸울 때는 여기서 끝인가 싶었는데
                            ⇨ 이기고 나니 또 여기까지 도우신 것이다.
   ○ 먹을 물이 없을 때에 이제 여기서 목말라 죽는가 싶었는데
                            ⇨ 반석을 처서 물을 주시고 나니 또 여기까지 도우신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 곳, 그 곳 마다에서 할 수 밖에 없는 고백이 있다.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다」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당하게 백성들에게 말씀 하신다.
       신 29:5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게 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
                    (이 말씀은 요단을 건너기 직전, 모세가 죽기 직전에 주시는 말씀.)
       그리고 이들은 마침내 그들이 대망하던 가나안 땅 앞에 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닥쳐진 현실과 앞을 보면 여기가 끝인가? 여기서 끝나는가? 싶었는데
                          ⇨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셔서 지금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내일이 되면 또 「여기까지」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 임금에게 쫒기는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
           그렇지만 그는 그 위기의 순간 순간 마다
                               「주님의 여기까지 도움」의 은혜를 얻었다.
       그리고 결국은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여기 풀무불 구덩이에서 죽는 것으로 끝인가 싶는데
                   ⇨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시고 더 크게 들어 쓰시는 것이다.
          여기 사자굴로 끝으로 내 인생도 끝나는가 싶는데
                   ⇨주님은 사자굴, 여기까지도 도우시고 더 크게 들어 쓰시는 것이다.
    주님의 도우심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들에게는 「여기가 끝인가 보다?」가 없는 것이다.
    왜 그렇는가? 언제나 「여기까지 도우시는 θ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제 끝인가 싶은 그 자리가 승리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끝인가 싶은 그 자리가 새로운 시작의 자리가 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끝인가 싶은 그 자리가 주님의 축복의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여기까지만 지켜 주실 것인가?
           그렇지 않는 다는 것을 다윗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기도한다. 기도할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주의 종이 이 기도로 주께 간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27)
      여기까지 함께 해 주시는 주님께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가?
      어제까지 함께 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니 기도할 마음이 생기는가?
      ☞ 우리는 기도할 마음이 생겨야 한다....
                  다윗은 기도할 마음이 생겨서 무슨 기도를 하는가?(29절)
            「이제 청하건대 종의 집에 복을 주사 주 앞에 영원히 있께 하옵소서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사오니 주의 종의 집이 영원히 복을 받게 하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다윗의 고백과 감사가 오늘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있기를 축원한다.
   2012년 12월 30일 마지막 주일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주님」
              또 2013년 12월 29일 마지막 주일에도 또
               「여기까지 이르게 하신 주님」이라고 감격하는 우리들이 되어지를 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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