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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상잔의 비극

사사기 20:8~16

(동영상보기:6.26의 여러 가지 사진들)

오늘의 본문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6.25 상기 57주년 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57주년 기념 예배라고 하지만, 

      ⇨ 나는 그 말의 의미상 약간의 잘못된 점이 있는 것 같아서 상기 57주년이라고 하고 싶다.

기념이라고 하면? ⇨ 지난 날의 어떤 좋은 날이나 일을 기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기념이라는 말을 쓰기가 싫다.

6.25는?  1950년 6.25일부터 53년 7월27일휴전때까지 3년 1개월의 전쟁

철저히 북의 위장전술에서 시작되었다.

    1. 8월 5일부터 8일 사이에 남북한 통일선거 실시

    2. 이 곳에서 선출되는 통일 최고 입법기관을 8월 15일 서울에서 소집

    3. 그 준비를 위해 6월 15일부터 17일 까지 해주나 개성에서 남북한 정당 사회 단체 대표자회의 개최하자

        북한은 이러한 제안을 6월 7일, 우리 정부에 제안해 왔다.

 

요즘은 6.25 사변를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이 말도 전 세계적인 테두리에서 보면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의 먼 후 세대가 6.25의 전쟁을 지나간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한국전쟁이라고 하는 것도 용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 세대, 아직도 6.25의 그 험난한 생사의 위기를 지난 분들이 있는 한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좀 합당하지 않는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면? ⇨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은 한국에서 일어난 한국 사람들 저들간의 전쟁이라는 개념을 더 많이 담고 있는 기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표현을 좀좀히 생각을 해 보면 남,북 당사자 모두가 똑 같이 전쟁을 한 것으로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 A,B 두 사람이 싸웠습니다. B가 가만히 있는 A에게 싸움을 걸어와서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싸움을 「AB싸움」 이라고 하면 A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B와 똑 같은 부류로 취급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어도 A는 그 싸움을 「B가 A에게 걸어 온 싸움」이라고 해야 A는 좀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또 요즘은 이 6.25 사변를 북침이라는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아직까지 전혀 먹히지 않는 소리지만 이런 소리를 하는 사람이 생겨 났다는 것에 대해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그리고 또 6.25 사변때에 있었던 많은 사건들, 특히 양민 학살에 대해서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진 것들은 많이 노출되고 있는 반면에 공산군에 의해서 자행된 수많은 사건들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는 희얀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6.25 당시를 겪었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분명 공산군에 의해 양민들에 자행된 수 많은 사건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언급을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던지 지금의 우리 뇌리에서는 이 6.25의 전쟁이 잊혀져 가고 있다.

 

지금은 6.25 사변의 노래를 아는 자가 별로 없다.

                              박두진 작사, 김동진 작곡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 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 내어 /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울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      /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겨레.

 

노래를 부르지 않는 다는 것은 그것을 잊어 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지 않는 다는 것은 신앙의 퇴조를 의미합니다.

요즘의 젏은 세대는 6.25를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로 인식을 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전쟁은 여전히 현실을 사는 우리와 끊어지지 않고 위험하게 연결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6자회담이 그렇고, 북한의 핵 문제가 그렇고, 이산가족 문제가 그렇고, 남북경협이 그렇고,

쌀지원문제와 에너지 지원 문제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 이런 것들 중에 하나라도 삐딱하는 날에는 우리 국민들이 염려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또? 혹시나? 하는 전쟁의 위험이 머릿속에 잠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던지 이 6.25 사변의 전쟁은?

    동족이 원수가 되는 전쟁이었다.

    친구가 적이 되는 전쟁이었다.

    한 민족이 서로의 피를 흘리는 전쟁이었다.

    모든 행복을 앗아 가버리는 전쟁이었다.

    광복의 희망을 절망으로 바꾸어 버리는 전쟁이었다.

       ⇨ 그 후유증이 57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있게 만드는 엄청난 전쟁이었다.

6.25의 통계 자료를 보면

유엔군이 한국군을 포함하여 18만명이 생명을 잃었고,

공산군측에서는 북한군 52만 명,중공군 9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또한 전쟁기간 중 대한민국의 경우 99만 명의 민간인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1000만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어 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 동족상잔의 비극이 성경에도 나와있다.

애굽에서 같이 고생하고, 광야를 같이 고생하면서 나왔고, 그리고 같이 힘을 모아서 가나아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12지파이다.

그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는 지파가 베냐민 지파였다. (베냐민 지파는 야곱의 12 아들 중 막내였고, 야곱의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아들이었고, 라헬이 그를 낳을 때 죽으므로 더 애정이 가는 지파가 베냐민 지파였다.)

요셉은 애굽의 국무총리로 있으면 그 동생 베냐민을 제일 보고 싶어 했고, 가나안 땅에 있던 그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을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런 사랑 받는 베냐민 지파와 다른 모든 지파와의(1:11의 싸움) 싸움이 벌어지는 사건이 사사기 19장부터 시작에서 21장까지에 이르고 있다.

이 싸움으로 인하여 베냐민 지파는 거의 전멸 직전에 이르게 되고 만다.

   싸움에 임했던 베냐민의 장정 2만5천명이 죽고 겨우 살아 남은 사람은 600명 정도였다.(20:46)

이 싸움의 원인?

1.영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사사기의 마지막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 이것이 잘 못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지만 하나님은 계십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모세 시대 때는 물론이고 사사기가 시작되기 전의 여호수아 시대때에는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지도자이고 인도자이지만 모세도, 여호수아도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나중에 다윗도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러나 사울 임금은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는 성도는 성공하는 성도이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 성도는 실패하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교회는 성공하는 교회이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 교회는 실패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 묻는 가정은 성공하는 가정이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 가정은 실패 할 가정입니다.

   하나님게 묻는 나라는 성공하는 나라이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 나라는 실패 할 나라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 때에는 하나님께 묻지 않습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합니다.」 ⇨ 이러니 문제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니 ⇨

                            나는 옳다고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 이 사이의 조절을 해 줄 분이 없습니다.

              ⇨ 이 사이의 조절에 주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인데 이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모세와 백성들간에 자기의 소견에 옳은일을 가지고 갈등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손을 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백성들은 잠잠합니다.

      ⇨ 그 사건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 사건입니다.

      ⇨ 그 사건이 고라, 다단, 아비람, 온의 사건때입니다.

   ?? 만약에 이때 하나님의 개입이 없고, 「자기의 손견에 옳은대로만 행하면?」 싸움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통령은 대통령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백성은 백성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여당은 여당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야당은 야당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남편은 남편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아내는 아내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부모는 부모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자식은 자식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목사는 목사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고, 장로는 장로의 소견에 옳은대호 행하고.....

           ⇨ 그러면 싸움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현실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브라임 지역에 한 레위 사람에게 첩이 있었는데 그 첩이 친정 베들레헴에 가서 돌아오지를 않았다.

레위 사람은 그 첩의 집에 가서 그 첩을 찾아 데려 오다가 해가 져서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들어가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는데 해가 지도록 아무도 그들을 영접하지를 않았다.

해가 다 졌을 때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 오다가 이 사람들르 보고 자기 집으로 영접을 해서 묵게 했다.

   그런데 그때 베냐민의 기브아 사람들이 노인 집에 들어닥쳐서 그 레위 사람의 첩을 농간하게 되는데 결국은 그 여인은 죽게 된다.

레위인은 거기에서는 무서워서 아무 말도 못하고 시체를 나귀에 싣고 자기 집에 돌아와서 그 억울함을 호소를 하는데 시체를 12 조각을 내어서 각 지파별로 보낸다.

   ⇨ 각 지파들에서는 도대체 이것이 무슨 일인가 놀라고 미스바 광장 40만의 군사가 모여서 무슨 일인가를 고하라고 할 때 레위 사람이 그대로 말한다.

이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냐민 지파에게 기브아에서 그 일을 저지런 사람들을 내어 놓으라고 한다.

    “그런즉 이제 기브아 사람 곧 그 비류를 우리에게 붙여서 우리로 죽여 이스라엘 중에서 악을 제하여 버리게 하라”(20:13)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이 소리를 듣지 않는다. 오히려 기브온이 자기 지파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쪽 편을 들게 된다.

  결국은 11지파VS 베냐민 지파와의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 이스라엘 연합군은 40만Vs 베냐민은 2만6천명이었다.

      1차 싸움에서 베냐민이 이기게 되어 이스라엘 2만2천명을 죽이고 승리를 얻는다.

  11지파는 하나님께 울부 짖는다.....

     “여호와 앞에서 저물도록 울며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다시 나아가서 나의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20:23)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는데 「올라가서 싸우라고 하신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고 싸웠는데도 2차 싸움에서 또 베냐민이 이긴다. (이스라엘 1만8천을 죽임)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 다시 하나님께 묻는다. ⇨ 정말 우리 형제 베냐민과 싸워야 되느냐고?????

    - 하나님은 내일 싸우라고 하신다.

결국 이 싸움에서 베냐민의 2만5천명이 죽고 겨우 살아 남는 사람이 600명 정도였다.

이 전쟁 후 이스라엘 11지파 사람들이 명세를 하는데?

   「딸들을 베냐민에게 주지 않기로 했다」

       ⇨ 그러면서 이들은 그들의 한 지파가 이지러졌음을 한탄하면서 밤새 대성 통곡을 하였다고 하고 있다.(21:2)

그리고 이들은 결국 다시 베냐민 지파를 일으킬 생각을 해 내는데

   베냐민 지파에게 평화를 공포하고 실로의 절기때 무도하려 나오는 여자들을 아내로 붙들어 가서 아내를 삼게 하는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 그래서 베냐민 지파가 겨우 유지되게 되었다......

여기에 교훈이 있다.

  베냐민 지파는 자기의 편이라고 해서 기브온의 편을 들다가 이런 큰 싸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지파는 또 감정적으로 베냐민 지파를 대했다.

      ⇨ 결국 이 싸움은 6.25와 같이 동족상잔의 비극이 되었고, 두 진영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전쟁이 되고 만 것이다.

이 전쟁으로 양쪽에서 죽은 수가 6만5천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아픔을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의 씨름은

  엡 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               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진짜로 싸워야 될 정사와 어둠의 권세, 악의 영들에 대하야 싸워야 될 에너지와 자원을 혈과 육의 싸움, 동족간의 싸움, 지파간의 싸움으로 소진해 버리고 만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민족이 한 영적 에너지가 되도록 이제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탄의 조정으로 민족을 분열케 하는 것이 틈타지 못하게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때의 그 분열, 그 싸움이 이제는 다시 베냐민과 11지파와의 화합으로 이어지는 것 같이 이어지게 만들어 가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이 우리 교회이이고 성도입니다.

사상, 이데올로기는 되지를 않습니다. ⇨ 서로 하나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11지파가 베냐만 1 지파를 이겼지 만 그 지파를 생각하는 그 사랑으로 다시 원래의 이스라엘로 회복시키듯이 회복시켜가는 우리 민족, 그 일선에 서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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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기적(18):이슬이 묻어 있는 양털

사사기 6:36~40

Ⅰ.기드온 사사에 대한 요약

1.이름의 뜻: 베는자, 벌채자

2.별명이 「여룹바알」이라 불리어짐(6:32):바알이 더불어 쟁론할 것이라

3.5대 사사

Ⅱ.하나님의 기드온의 부르심

1.언제 하나님이 기드온을 부르셨는가?

①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드보라 사사 이후 40년간 태평한 시간을 주었을 때 하나님께 범죄하 고 타락하여 있을 때.

⇨사람들은 태평하면 하나님을 잊어 버리기기 쉽다.....

그 태평이 자기들의 힘으로, 방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②미디안의 침범이 있어 7년동안 괴롭힘을 당하고 있을 때.

이스라엘은 미디인을 피하여 산에서 구멍을 파고 지내고 있었다.(6:2)

③기드온도 두려워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불렀다.

⇨ 그도 미디안이 두려워 하고 있는 한 연약한 농부에 불과했다.

☞☞◇모세도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초라하게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 불 렀다. ⇨ 하나님의 부름이 없었으면 모세도 광야의 한 목동으로 끝날 인생.

다윗도 8형제 중의 막내로서 아버지와 형님들에게서 조차도 인정 받고 있지 않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엘리사도 소로서 밭을 갈고 있을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왕상19:19)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다.....

2.하나님은 기드온을 부르실 때 무어라고 하면서 불렀는가?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6:12)

①무서움에 젖어 있는 기드온을 두고 하나님은 그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라고 말씀하신다.

그는 지금 큰 용사가 아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한 농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큰 용사가 될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이 󰡔큰 용사󰡕라고 하신다.

②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는 큰 용사가 된다. 하나님의 용사가 된다....

3.불러서 무엇을 하게 하셨는가?

「네 아비에게 있는 바알의 단을 헐어라」(6:26)

바로 자기 집에 있는 우상을 먼저 제하여 버리라!!!!!

⇨ 먼저 나와, 나의 가정에 있는 우상의 것을 제해야 한다....

②찍은 아세라 나무를 가지고 수소로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라.

아세라 상이 하나님께 번제 드리는 연료가 된다.

☞☞ 한때 우리가 섬기던 세상의 각종 것들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도구가 되게 해야 한다.

한때 내가 우상시 하던 물질

한때 내가 우상시 하던 권력

한때 내가 우상시 하던 힘

한때 내가 우상시 하던 지혜, 똑똑함....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도구가 되어 버리게 해야 한다.

Ⅲ.미디안을 물리치라.

1.연합하여서 쳐 들어온 미디안(32절)

미디안 + 아말렉 + 동방 사람들

⇨ 이스라엘을 계속 괴롭히던 이들이 마침내 연합을 하여서 대대적인 침범을 해 왔다.

이들의 수를 7:12에서?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의 중다함 같고 그 약대의 무수함이 해변의 모래가 수다함 같은지라"

2.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함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6:34)

⇨ 이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했다.

◇기드온에게 임했다는 것은 지금 기드온이 이 위기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적격자임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때를 위해 미리 기드온을 불렀고, 우상을 없애 버리게 했고, 준비시켰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스더 4:14)

☞☞ 성도는 이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3.그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신 것이다.

◇ 하나님의 신이 임했다는 것은?

⇨기드온의 인간의 힘으로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 우리가 아무리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도 내 인간의 힘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없다.

⇨ 성령의 도움,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능할 뿐이다...

4.기드온의 요구?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36절)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고 계신 확실한 증거를 보고 싶었다....

☞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얻기를 원했다.

엘리사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요단을 건넘으로서 확신을 받았다.

①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게 하소서(37)

⇨ 하나님은 그렇게 해 보여 주셨다.

②양털만 마르고 땅은 이슬이 젖게 하소서(39절)

⇨ 역시 하나님은 두말 하지 않으시고 이것을 행하셨다.

☞ 이것은 하나님의 전진 전능하신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드온이 이것을 요구한 이유는 기드온이 농사를 지으면서 이슬이 땅에 전부 내렸으면 내렸지 부분으로 내리는 것을 본 일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 만큼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련지 모른다.

5.기드온의 확신과 승리.

결국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가지고 미디안군을 무찌른다...

①이제 기드온은 하나님이 자기의 요구를 들어 주셨으므로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

즉; 32,000명의 군사를 10,000명으로, 그리고 300명으로 줄이라고 할 때 아무 불평없이 순 종을 한다.

②3,200명의 모인 수에서 300명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기적을 보여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 300명의 군사로 「메뚜기의 중다함, 약대의 무수함, 해변의 모래가 수다 함」(7:12)같은 미디안을 무찌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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