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석 목사 창세기 설교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
창세기 5:21~25
오늘의 성경말씀이 우리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에녹이라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않고 하나님의
데려감을 당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아담 이후로 범죄한 우리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고통이 필연적으로 오게되고
어느 누구도 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옛날 중국 대륙을 한 손에 쥐었던 진시황제도 이 죽음을 이기기 위해서 불로초를 구했지만
그도 역시 죽음을 면할 길이 없었다.
창시기 5장에 와서 보면?
아담으로부터 누구가 몇 살에 누구를 낳고, 몇 살까지 살다가 죽었다는 말씀이 8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 범죄 한 인간에게 인간은 반드시 죽으리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이다.
고려 말 유학자 우탁은 탄로가(歎老歌)를 이렇게 지었다.
「한 손에 막대 잡고 또 한 손에 가시쥐고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렀더니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 길로 오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분명한 말씀을 주셨다.
「이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렇다 분명히 죽는다.
그러나 의문? 아담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반드시(정녕) 죽으리라」고 한 그 의미를 알고 있었을까? 하는 것이다.
왜? 아담은 아직 죽는 것을 하나도 경험하지 못했다. 죽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을 직접으로든지, 간접으로든지 경험을 해 보지 못했기에
하나님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그 말씀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담이 죽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 바로
그의 아들 아벨의 죽음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제일 먼저 죽은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반드시 죽으리리」 라고 하는 말을 알지 못하고 죽었을련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서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도 930세를 일기로
죽게 되었다.
그 후로 죽음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그런데 그 「몇살에 누구를 낳고, 몇 살까지 살다가 몇 살에 죽었다」고 하는
이 말과 관계 없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이 바로 에녹이다.
오늘 에녹에게는 「죽음」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하고 있다.
⇨ 우리는 이것을 다른 말로 에녹이 승천을 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다.
우리가 이 에녹의 죽음을 아담의 죽음과 연대차를 보면 아담이 죽고 난 뒤 57년 뒤에
에녹이 승천을 한 것을 볼 수 있다.
성경상에서 죽지 않고 승천을 한 사람은 본문의 에녹과,
열왕기하 2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엘리야 두 사람 뿐이다.
그래서
○구약의 에녹과 엘리야는 승천이 있다는 것을 보증해 주는 한 사건이다.
○신약의 나사로의 부활, 나인성과부의 부활 12살 여아의 부활도 부활에
대한 보증과 확신을 세워 주는 사건이다.
⇨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승천은 이 두 사건을 합해서 한꺼번에 보증을 해 주는 사건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3가지의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① 사람은 이 세계가 아닌 하나님이 데려가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
② 사람의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
③ 사람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다시 살아서 살 수 있다는 것.
살전 4:16~18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
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고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
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그를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동물들과 사람이 다른 것이 무엇이냐? ⇨ 먹고 사는 것은 같다.
동물들에게는 영혼이 없고, 영적인 세상이 없다.
⇨ 그러나 사람들에게 영혼이 있고 영적인 세상이 있다.
아무리 미개한 사람이라고 해도, 그 미개한 종족들도
⇨ 각기 자기 나름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원을 사모하는 의식을 행한다.
우리는 이 7,80의 세상을 살면서 영원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5~6살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20대 중, 후반까지 공부를 한다.
열심히 공부를 한다..⇨30대부터 펼쳐지는 그 인생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한다.
즉 25,6년 동안 공부를 해서 3.40년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잘 살아 보다고 죽자고 공부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우리가 이 세상에 7,80의 세월을 살면서 왜? 왜? 왜? 영원을 준비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 교회와 성도들을 7,80년의 이 세월을 영원을 준비하는 시간으로 만들기 축원한다.
1.에녹은 하나님과 동행을 했다.
그의 처음의 삶이 어땠는가에 대해서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 65년은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지 않다.
그 65년을 어떻게 살았는가는 아무른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름을 받기 전에 어떤 삶을 살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사실은 문제가 되지만 주님은 적어도 주님 앞에 나아온자에게는 그것을 묻지를 않습니다.
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선하게, 착하게 살았다고 한다 할찌라도 주님께서 물으신다면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 주님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 주셨는데
우리는 그 나인성 과부의 행적과 죽었다가 살게 된 그 당사자 아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네 아들은 다시 살아날 가치가 있다!
어머니인 너의 행적이 선하였기에 이에 대해서 내가 보상을 해 주마!
그래서 주님께서 계산을 해 보시고 그 아들을 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그냥 불쌍해서 살려 주신 것이다.
○ 주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게 그의 과거를 묻지 않으셨다.
○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그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에 대해서는 묻지를 않았다.
⇨ 그냥 「물을 좀 달라 하시니」라고 했을 뿐이다.
오히려 물음은 사마리아 여인이 했다.
「유대인인 당신이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우리는 에녹의 처음 65년은 모르지만 그 후의 300년은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직접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2사람이 나온다.
오늘의 이 에녹이고, 노아이다.
노아에 대해서는 6:9에서 「그는 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했다.
그래서 에녹은 모든 사람은 다 죽는데 죽음을 맛보지 않은 사람이고,
노아는 모든 사람들이 다 심판을 받는데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다.
⇨ 결국 죽음이라는 것을 인간 개인의 심판으로 본다고 하면 에녹은 그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은 사람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 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1)하나님과 동행을 한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있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주님과 영적 교제를 하게 된다.
영적인 교제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내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 주님이 잠시도 나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주님과 떨어질려고 한다.
○우리는 내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주님과 떨어질려고 한다
○우리는 내 인생의 쾌락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과 떨어질려고 한다.
⇨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다가 주님에게서 떨어지게 되면 그 떨어지는
즉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더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요15:5)
우리는 주님을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떠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겸손히 나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나는 주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동행해 주셔야 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2)주님과 동행을 했다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거룩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라야 같이 동행을 할 수가 있지 같은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동행을
할 수가 없다.
⇨ 동행을 할려고 하면?
같은 뜻. 같은 생각, 같은 이상, 같은 차림, 같은 생활이 되어야 한다.
⇨ 그렇지 않으면 둘이서 같이 동행을 할 수가 없다.
①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 하나님과 같은 뜻의 소유자였다.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뜻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다.
가지고 있는 뜻이 다르면 동행을 할래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명 구원의 뜻이다. 하나님나라 확장의 뜻이다.
☞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뜻을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후6:1)
“그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요삼1:8)
☞ 바리새인들이 주님과 동행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 주님의 뜻과 그들의 뜻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7:30)
⇨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주님과 뜻을 맞추어 가야 한다.
주님의 뜻을 나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
②에녹은 하나님과 같은 생각이었다.
생각이 다르면 동행 할 수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 제자들이 흩어졌다.
그 중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면서 내려가고 있는가?
“우리 생각에는 그가 예루살렘을 구속할 자라고 바랐노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생각하고 달리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 그래서 실망을 하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같은 생각이 되어야 같이 손해를 볼 줄도 안다.
같은 생각이 아니면 같이 손해를 볼려고 하지도 않는다.
○같은 생각이 되어야 같이 길을 갈 수 있다.
같은 생각이 아니면 이정표에서 갈라지게 된다.
○같은 생각이 되어야 같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 같은 생각이 아니면 이익이 생겨도 그 이익이 이익 되지 못한다.
Ex) 이야기 중 길 가다가 금덩이를 주운 형제 이야기.....
결국 그 금덩이를 강에 던져 버렸다.(같은 생각이었다)
이야기 중 추수 때 두 형제 볏단 나르는 이야기(형제가 같은 이야기였다.)
③주님과 같은 차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과 동행을 할려고 하면 주님과 같은 차림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이 입혀 주신 의의 보혈의 옷을 입어야 한다.
○주님께서 입혀 주신 의의 세마포 옷을 입어야 한다.
○우리는 성도의 옷을 입어야 주님과 동행이 가능하다.
⇨ 옷 차림이 완전히 다르면 동행을 할 수가 없다.
☞ 전쟁을 하면 군복이 다르다. 운동경기를 하면 운동복이 다르다.
응원을 하면 응원 도구가 다르고, 옷이 다르다.
④같은 생활을 할 수 있어야 동행이 된다.
○아간은 여호수아와 동행할 수 없는 자였다.
⇨전쟁 통에서 그 혼자만의 이익을 구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게하시는 엘리사와 동행할 수 없는 제자였다.
⇨ 욕심으로 함께 생활 할 수 없는 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이 배고플 때 같이 고파하는 자,
주님의 고통이 있을 때 같이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자,
주님이 십자가 질 때 같이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 부부는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어야 동행을 가능하다.
⇨ 같은 생활을 할 수 없으면 동행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은 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세상은 자기와 동행하라고 유혹하는 세상이다.
물질과 동행을 하라!.
명예와 동행을 하라!
쾌락과 동행을 하라!
우상과 동행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한 평생 하나님과만 함께 동행하는 귀중한 성도들이 되어서
사탄이 데려가는 자가 아니라
오늘 에녹과 같이 「하나님이 데려가는」 축복 받은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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