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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석 목사의 부활절 설교 부활을 믿는 성도들
히브리서 11:35~40오늘의 본문 말씀이 우리 교회와 성도들에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확실하게 구별짓는 것은 부활이 있다는 것이다. 이 부활이 없다고 하면 우리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과의 차별성을 말 할 수 없다. 주님의 죽으심도 어떤 정의로움의 죽음, 희생의 죽음 정도로만 끝 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그냥 정의로운 죽음, 희생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인류의 구원을 위한 대속의 죽음, 구원의 죽음이 되는 것이다. 부활은 소생이 아니다. ⇨ 우리는 봄을 말할 때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라고 한다. 겨울동안 죽은 듯 있던 나뭇가지에 움이 돋고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소생한다고 한다. 소생은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가운데 움츠리고 있다가 회복되는 것을 소생이라고 한다. 부활은 환생이 아니다. ⇨ 환생은 형상을 바꾸어서 태어나는 것을 말한다. 불교와 힌두교의 윤회사상에서 비롯된 이 환생 사상은 사람과 동물이 죽으면 다른 어떤 형체를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가끔 T.V의 「세상에 이런 일이」 같은 것을 보면 이런 것이 자주 나온다. 부모가 죽고 난 뒤에 메뚜기가 한 마리 날아 왔는데..... 나비가 한 마리 날아 왔는데 영정 사진에 앉는다...... ⇨시간적으로 이미 그 나비나 메뚜기를 그 고인이 살아 있을 때인 그 한해 앞에서 부터 존재 했다.(번데기 등으로) 그런데 이것은 영과 육, 생각과 감정에서 전혀 연속성이 없다...... 성경은 부활을 말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소생도 아니고, 환생도 아니다. 부활이다. 부활한 몸은 썩지 아니하는 몸이다. 영광스런 몸이다.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다. 자기의 정체성에 연속성을 갖는다. 몸의 존재 양식에 있어서도 연속성을 갖는다. 부활한 몸은 완전한 몸이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마지막 해답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은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전15;14)고 지적한다. 주님의 부활은 주님 자신의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연결되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에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벧전1:3~4)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생명의 회복, 삶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부활은 사망과 저주 아래 있는 우리 인간들의 삶에 구원과 생명을 주었고, 자유와 승리, 용기를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처럼 빌3:10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라“ 의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필요 없다. 죽음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부활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부활이 있기 전에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 - 죽음인 것이다. 그러면 죽음은 무엇인가? ⇨ 죽음은 인간이 가지는 가장 두려운 것입니다. Ex)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라사콜리나크프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두렵고 초조하고 불안합니다. 나중에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쇼냐에게 요한복음 11장을 읽어달라고 합니다. 죽음을 눈 앞에 두고 보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요한복음11장을 읽어 달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 하는 것도 결국은 죽음의 두려움 때문이다. ○십자가 후 제자들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있는 것도 죽음의 두려움 때문. ○사람들이 암이라는 질병에 두려워 떠는 것도 죽음의 두려움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금요일의 밤, 토요일의 밤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이 금요일의 밤, 토요일의 밤이라는 것은 주님이 죽고 무덤에 들어가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절망의 밤입니다. 좌절의 밤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포기의 밤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밤을 제자들과 같은 두려움의 밤을 지내고 있고, 공포의 밤을 지내고 있다. 부도라는 위기의 밤, 실연이라는 위기의 밤, 무서운 질병이라는 고통의 밤, 우리들에게 이것들이 없어야 되겠지만 어쩔 수 없이 이것들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은 이것을 이기고 벗겨 주는 부활이라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금요일의 밤, 토요일의 밤을 지내고 있다고 할찌라도 주일의 새벽은 부활의 새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새벽, 승리의 새벽을 맞기 전인 금요일 밤, 토요일의 쓰라린 고통의 밤에 인생을 포기해 버리고, 삶을 포기해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포기하고 엠마로로 내려가 버리고 마는 사람 ○3년 전의 상태로 물고기 어부로 다시 나사는 사람들 ○극기야는 그 밤을 이기지 못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마는 사람들...... 조금만 지내면 부활의 소식이 있는 새벽이 될 것인데.... 죽음을 이긴 주님의 부활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부활이 나의 것이 될 것인데.. 모든 어둠과 고통을 한꺼번에 몰아 가버리고 삼켜 버릴 부활의 새벽을 맞을 것인데.... 그 시간을 견디지 못하여 인생을 완전히 포기를 선언해 버리는 것이다. 최진실이 그렇고, 최진영이가 그렇다..... Ex) 엘리 위젤의 「흑야」 아우슈비츄 수용소애서 어른 두 명과 아이 한명의 교수형이 있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있다. 3대의 교수대에 어른 둘, 아이 하나 처형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과연 하나님은 어디계신가? 교수형이 되고 얼마 후 엘리 위젤은 고통 속에 죽은 두 남자의 시체를 보았다. 그런데 아이는 아직 죽지 않고 목숨이 붙은체 메달려 고통스럽게 떨고 있었다. 그때 다시 누군가가 물었다. ⇨ 과연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우리도 가끔 이 질문을 던진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약속으로 가득차 있는데... 그래서 예수님으로 통하여 도움을 받고자 예수를 믿었는데, 예수님을 믿어서 어려움들과 고통이 없어지기를 바랬는데.. 예수님을 통하여 이 질병이 낫고자 예수를 믿었는데.... 주님은 계시는지 않계시는지..... 기도의 응답은 없고 문제는 더 심각하여져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런 일이......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엘리 위젤은 말한다. 하나님이 어디계신가? 라고 질문할 그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신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나 여기 있어 여기 교수대 위에서 같이 목이 매달려 있어...... 너와 같이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있어(너와 같이....) 주님은 우리의 고난에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그 고난과 죽음을 만회 하여 주십니다. 독일의 본훼퍼라는 신학자는 말했다. ⇨ 고난 당하신 주님만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 십자가에서 철저히 버림받으시고 고난 받으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기막힌 상항을 도우실 수 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눈물을 딲아 주실 수 있고, 우리를 보듬어 주실 수 있고, 공감해 주실 수 있다. Ex) 아기를 낳아보지 않는 자가 아기 낳는 여자의 아픔을 공감할 수 없다. 통풍의 아픔을 경험해 보지 않은 자가 통풍의 아름을 공감할 수 없다.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아픔을 당하셨고,...... 주님은 우리가 당하는 모든 괴로움을 당하셨고, 주님은 우리가 죽어야 될 그 죽음을 우리 앞서 죽으셨다. 그런데 그 공감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공감하는 것 만으로는 여전히 아픔은 아픔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주님에게는 공감하는 그것 보다 더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있다. 주님은 공감하는 하는 위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그 위로도 대단한데....) 그 공감의 위로 너머에 더 큰 위로를 준비하고 있다. 그것이 부활이다. 그 부활로 지금의 아픔과 괴로움을 모두 없애실 것이다. 지금은 금요일 밤, 토요일 밤이다.... 주님이 없는 것 같은 세상, 다 죽어 버린 세상, 다 끝난 버린 세상.... 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1.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안을 없애준다. 진정으로 우리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죽음조차도 우리를 이기지 못한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사후 두려워 떨고 있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 있어야 하는 공포 속에 있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이 그 죽음의 공포를 깨끗이 청소하였다. 사도행전에의 사도들의 모습은? 죽음을 초월하는 복음 전도자들이 되었다. 2.부활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슬픔, 눈물을 없애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엠마오의 두 제자는 슬퍼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죽으셨던 주님이 부활하였다. 주님의 부활의 소식은 순간 모든 이들의 슬픔과 탄식을 빼앗아 버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장 아픈 눈물, 가장 슬픈 눈물은 죽음으로 오는 슬픔이고, 눈물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인간이 가지는 이 가장 아픈 슬픔과 눈물을 멈추게 해 주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가 주님을 통하여 이 소망을 얻었습니다. ○나인성 과부가 주님을 통하여 이 소망을 얻었고 눈물을 멈추었다. ○회당장 야이로의 식구들이 주님을 통하여 흘리던 눈물을 멈추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모든 인생들이 흘릴 수 밖에 없는 이 슬픔과 눈물을 소망의 눈물로 바꾸어 주었다. 부활주일을 통하여 우리교회와 성도들도 같이 이 소망을 얻기를 바란다. 3.주님의 부활은 죽음 후의 소망만이 아니라 지금의 소망이며 삶의 원동력이다. 괴테의 파우스트 ⇨ 파우스트가 인생의 의미를 모르고 살아간다. 나중에는 허무에 빠져서 자살을 하려고 한다. 그때 교회에서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 합창 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눈이 뜨였다. 그 순간 그는 내면으로부터 이상한 힘이 솟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그는 인생의 깊은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였느니라”(38)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했는데도 감당하지 못하였는가? 고문, 채찍질, 돌로 치는 것, 톱으로 켜는 것, 칼로 죽이는 것, 유리하는 것.. 인간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으로 위협하고, 협박하였지만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들은 감당하지 못하였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전한 부활의 신앙을 가집시다. 주님은 부활을 통하여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 주셨고,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 주셨습니다. 지금 어둠의 밤을 지내고 있다고 할찌라도 부활의 새벽은 옵니다. ○재판과 심문과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 ○과연 저 분이 주님이 맞는가 싶은 시간이 있었지만 ⇨ 그래 나는 주님이다. 메시야다. 구원자다. 영생이다를 부활을 통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고 이제 우리 성도들도 오늘의 성경의 성도들처럼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승리의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가난이 감당하지 못하여 비껴가고 질병이 감당하지 못하여 비껴 가고... 핍박이 감당하지 못하여 비껴가고... 고난이 감당하지 못하여 비껴게 만드는 부활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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