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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 주위의 사람들

요한복음 9:35~41

오늘의 본문 말씀이 여러분의 심령에 생명의 말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한 소경을 만나게 되었다.

이 소경을 보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 사람이 이렇게 날 때부터 소경인 것이 「부모의 죄」 때문인지, 아니면 「소경 자신의 죄」 때문인지를 물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그 부모의 죄 때문도, 그 자신의 죄 때문도 아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고 하는 대답을 주셨다.

이 말씀을 마치고 예수님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의 눈에 발랐다.

그리고 그 소경에게 말씀하시를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했더니 그 사람이 가서 씻었더니 그 사람이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9:5에서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고 자기 자신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빛되신 자기에 의해서 지금까지의 삶을 흑암에서 살아오던 천하보다도 귀한 한 영혼을 광명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이다.

이 사건으로?       주님께서는 개인적인 구주이심을 보여주고,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빛이심을 自證해 주는 귀한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소경의 고침으로 인하여 당시의 그 지역 사람들에게는 심각한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소경이라는 비웃음을 받아가면서 지팡이를 의지한체 거지의 신세로 지내오던 그가 이제는 어제의 그 사람이 아닌 완전한 다른 인격의 사람으로 변화된 데 대한 사람들의 반응인 것이다.

그러면 그 때에 그 소경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한번 점검해 봅시다.

1.첫째 제자들의 모습니다.

9장을 처음부터 읽어 보면 이 소경에 대한 관심을 제일 먼저 표명한 사람들이 바로 이 제자들이다.

이 소경을 지나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아예 그 소경 거지에 대해서 아무른 관심도 가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제자들이 이 거지 소경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이 소경에 대해서 관심을 보인 것은 그 소경을 불쌍히 여기거나 어떤 동정심에 대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그런 관심은 아니었다.

즉: 제자들은 이 소경에 대해서 배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은 그 소경을 보면서 무엇을 보는가?

죄를 보고 있다. ⇨ 그 자신의 죄, 혹은 그 부모의 죄....

   이렇게 제자들이 이 소경을 보면서 죄를 보고 있다는 것은, 제자들만의 생각이 아니고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의 흐름들이 그랬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어려움 형편과 사건, 사고를 통하여 죄를 볼 수도 있다.....

  ⇨ 그러나 그것만 보면 안 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구원을 볼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죄만 본다.  ⇨ 죄만 보니까 정죄하는 사람만 되고 만다.

                             죄만 보는 것은 아무른 유익이 없는 시선이고 시각이다.

그런데 죄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구원을 보면 생명의 시각이 되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을 살리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은 이 소경을 「죄의 시각」에서만 보고 「구원의 시각」에서는 전혀 보지를 못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을 무엇의 시각에서 봅니까?

                   「구원의 시각」에서 보고,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모든 사람을 볼 때 「구원의 시각」에서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특히 제자들이니까 그렇습니다. ⇨ 앞으로 사람들을 구원시켜야 할 일을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모든 사람들을 볼 때 「구원의 시각」에서 보았습니다.

      이방인을 볼 때도, 세리를 볼 때도, 창녀를 볼 때도, 문둥병 환자들을 볼 때도........

        ⇨ 당연히 「죄의 시각」에서 봐야 할 사람도 「구원의 시각」에서 보신 것이다.

                ⇨그러니 그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것이다.....

☞ 성도는 당연히 모든 사람들을 볼 때 「구원의 시각」에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전도가 되고, 그래야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2.이 소경의 눈 뜸에 대한 이웃 사람들의 반응이다.

이 사람들은 같은 동내에 살면서도 이 소경을 바로 알지를 못했다.

이 소경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고침을 받고 왔을 때 동내의 사람들은?

    「그 사람이다. 아니다! 비슷하다!」로 왈가왈부 하고 있었다....

성경은 분명히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들은 이웃이다. 그러나 이 걸인의 진정한 이웃은 아니었다!

         ⇨ 사는 거리로서만의 이웃이지 사람과 사람으로서의 교감이 있는 이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이 사람의 눈 뜬 것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 보지를 못하였다.

☞ 진정한 이웃이라고 하면 이 사람의 형편과 이 사람의 모습과, 이 사람의 삶과, 이 사람의 아픔을 아는 것입니다.

    오래 되면 될 수록 더 알아가야 하는 것이 이웃입니다.

        ⇨ 그런데 이런 경우??? 오래되면 될 수록 오히려 거리만의 이웃이되지 교제로서,

           교감으로서의 이웃으로서는 점점 멀어져 갑니다.

☞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에? 한 교회라고 하는 이웃이 있다. 한 구역이라고 하는 이웃이 있다. 한 기관이라고 하는 이웃이 있다......

       ⇨ 그런데 한 교회라고 하는 이 이웃으로만 있지 교제로서, 교감으로서, 같은 기도로서의 이웃으로는 있지를 못하는 성도가 많이 있다.......

☞ 교회에는 이웃을 삼아야 하는 성도가 있고, 이웃이 되어야 하는 성도가 있다.

   오늘의 본문 배경으로 말하면 이웃의 사람들은 이 소경을 이웃으로 삼아야하는 사람들이고, 소경은 이웃이 되어야 하는 사람인 것이다.

       ⇨ 이 둘이 합해야 진정한 이웃이 되는 것이다.

           동내의 사람들은 이 소경은 이웃으로 삼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소경은 이웃이 되어 주어야 한다...(난 거지인데, 난 소경인데.....하고????)

   교회에서는 먼저인 성도가, 믿음이 더 있는 성도가, 오래된 성도가, 가진 성도가.... 이웃을 삼아 줘야 한다.........

오늘의 이 이웃들은 심지어 “내가 그로라”고 소경이 자신을 말해 주었지만 믿지를 못했다.

이 사람들은 이 소경이 받은 은혜, 축복을 신기해 하고, 의문만 품고 있을 뿐이지 같이 기쁨을 나누고, 같이 은혜를 누리는 사건으로 만들지를 못했다....

☞ 여러분!

옆의 성도가 은혜를 받으면 같이 기뻐하세요, 같이 누리는 자가 되세요....

                                               ⇨ 그러면 그 은혜가 나에게도 옵니다.

    신기해 하고만 있고, 의문만 품고, 호기심만 가지고 있으면 나하고는 상관 없고 그 사람의 것으로만 끝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옆의 성도가 기도를 많이 하여서, 헌신을 하여서, 순종을 하여서

         ⇨ 은혜를 받고, 응답을 받았다면 그것을 같이 누릴려고 하는 자가 되십시요.......

3.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 유대 종교계를 대표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소경에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가를 세심하게 물었다.

이때 소경이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실로맘 못에가서 씻라고 해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말을 했다.

이 소리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책잡기 시작했다.

이 바리새인들은 이 사람이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한 기쁨은 하나도 없다.

인간으로서의 감정 마저도 완전히 매말라 버린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심지어 그 부모들을 불러서 “정말로 이 사람이 너희의 아들이냐”고 묻고 확인하고서도 의심을 하고 있고 믿지를 못하고 오히려 이것을 계기로 예수를 책잡을려고 하는 자들이었다.

☞☞ 이들은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듣고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의 이권과 그들의 자존심과, 그들의 신분 때문이다.

Ex) 극장의 안내방송; 극장내에서는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금연으로 되어 있으니 담배를 피우고  자 하는 자는 금연실로 가서 피우시기 바랍니다고 해도 여전히 버젓이 연기를 날리고 있는 사람....

바로 옆에 건널목 표지가 있는데도 그 옆을 지나 건너가는 눈떤 소경,

국민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딴전만 피우고 있는 나리님들....

그리고 우리들의 신앙 생활에서도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면서도 그 은혜에 감사하  지 못하는 자들

성경은 열심히 읽으면서도 그 말씀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들.........

이병석이가 다리 아파 못 걸을때 교회 간다고 나으면 나도 가겠다고 했던 그 사람들이......

4.소경의 부모의 반응이다.

이 부모들은 자기 아들이 보게 된 것 때문에 바리새인들에게 소환을 당하여서 질문을 받았다.

   네 아들이 맞느냐?”

   “네 아들이 어떻게 보게 되었느냐?”

그때 이 부모가 하는 말이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요9:20-21)

이 부모들의 대답이 애매 모호 하다...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 우리 아들이고 소경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확실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알고 있다.

성경은 이 부모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출교를 당하는 것이 무서웠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부모들은 출교가 겁이 나서 자기 아들이 얻은 쾌유의 기쁨, 구원의 기쁨을 같이 가지지 못했다.

출교?    성도는 세상으로부터 출교를 당해야 주님에게 입교 할 수가 있다.

         세상으로부터 출교를 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주님에게 입교할 수가 없다.

             다니엘은 왕궁에서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모세도 애굽의 왕궁에서 출교 당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에스더도 왕비로서의 출교를 두려워 하지 않았다.

     ☞ 세상과 함께 살려고 세상으로부터 출교를 두려워 하면 주님과 함께 사는 생명의 은혜는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 가정으로 부터의 출교, 친구들로 부터의 출교, 직장으로부터의 출교......

5.당사자 소경이다.

그는 정확한 고백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웃 사람들로부터 오기심에 찬 불신앙의 도전을 받았고, 부모들로 부터의 비정한 도피적인 도전을 바았고, 바리새인들로부터 교활한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확신에 찬 고백을 한 사람이다.

그는 말의 흐름을 보자

     ⇨ 예수라는 사람이 나를 고쳐 주었다(11).

     ⇨ 그는 선지자니이다(17)

     ⇨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2)

이 신앙의 흐름, 고백의 흐름 때문에 결국 이 사람은 출교를 당하였다.(34,35)

  우리는 이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소경은? “예수라는 사람이 나를 고쳐 주었다고”만 하는 그 사실만 계속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는 아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그렇게 하지 않았다. ⇨ 서서히 그의 신앙의 고백을 붙여 가는 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사람이 사람들에게 쫓겨났다는 소리를 듣고 그 사람을 만났다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자기 때문에 고난 받고, 자기 때문에 어려움 당하고, 자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소외되어가고, 출회를 당하는 자를 결코 버려 두지 않으신다.

   ⇨ 찾으셔서 안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어느 그룹에 속해 있는 자인가?

바라기는 이 소경과 같이 육적 치유, 육적 구원, 영적 치유, 영적 구원을 받는 순종과 신앙의 고백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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