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1:사울의 부름 받음
사도행전 9:1-9
※ 9장은 사도행전 전체의 Turning point의 장이다.
왜 그런가? ⇨ 핍박자 사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일군이 되는 장이기 때문이다.
Ⅰ.핍박자 사울
①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사울
○사울은 자기가 믿고 있는 유대교가 참 종교이고 이 예수교는 사교라고 생각을 하고 마땅히
없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7장)를 통하여서 나름대로 더 큰 핍박의 힘을 얻었다.
☞ 복음에 대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지만 여전히 복음은 복음의 힘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8장)
☞ 핍박에는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지만 복음에는 「위협과 살기」가 없다.
복음에는 아무리 위기가 와도 「위협과 살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평화와 생명」이 있다.
⇨ 복음은 죽음 앞에서도 생명과 평안이고, 환난과 핍박 앞에서도 생명과 평안이다.
⇨ 스데반이 이것을 보여 주었고, 베드로가 이것을 보여 주고,
나중에 바울과 실라가 이것을 보여 주게 된다.
??? 바울의 입장에서 스데반이 잡히고, 순교할 때에 비굴한 모습(?)으로 죽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면 아마 사울이 쾌재를 불렀을련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데반의 당당한 순교는 오히려 그를 더 감정적으로 자재 하지 못하게 만드는 승리의 순교였다.
②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청했다.
○누가 시켜서 핍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청해서 잡아 오겠다고 공식적인 공문을 받으러 감
○예루살렘에서만 핍박하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울
※지금 사울은 진정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열심을 가지고 일하고 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기뻐하
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근심되게 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14에서 그가 고백하기를
“내가 내 동족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라고 했다.
☞그는 지금 하나님께 대한 헛 열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많은 이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들은 헛 열심에 속한 자들이다.
성도는 그 헛 열심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열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바울은 주님의 부르심의 장면을 다시 한번 언급하면서 하는 말이
행 26:14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헛 열심을 가지고 있은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골로새서1:26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제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하는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
☞성도는 만화보는 열심 ⇨ 성경보는 열심,
마실다니는 열심 ⇨ 전도하는 열심
TV보는 열심 ⇨ 성경보는 열심
※그는 나중에 그가 했던 고백처럼 이러한 헛 열심으로 인하여
“죄인중의 내가 괴수니라(딤전1:15)고 했다.
그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뿌리 채 뽑을려고 했다는 점에서 이 보다 더 큰 죄인은 없는 것이다.
즉 그는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사역에 제1 선봉장으로 서서 일을 하고 있은 것이다.
Ⅱ.주님의 부르심
①하늘의 빛이 저를 둘러 비춰었다.
○그는 하늘의 빛에 의하여 포위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빛에 의해 사로 잡혀 버린자가 됐다.
☞성도들을 사로잡아 공회에 넘기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던 그가 오히려 하늘의 빛에 의해
포위가 되어 버리고, 사로잡혀 버리게 된 것이다.
※모든 죄인은 복음의 빛이 그에게 비취기까지는 다 어두움에 존재를 하는 자들이다.
이 어두움에 존재하던 사울에게 주님은 생명의 빛, 구원의 빛으로 비추시고 포위하여 사로
잡아 버리는 것이다.
이 후 부터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갇히는 자가 되었다.
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나중에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감옥에 갇히는 자가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사울은?-많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했지만 그 복음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는 안았다.
그것은 그가 영적인 눈과 귀가 멀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했다.
생명의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은 그 빛을 감시할 수 있는 영적인 시력이 없었다.
사울도 주님이 살아 계실 때도 그렇고 스데반의 순교의 때도 그 빛을 감지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그는 그 빛을 느끼고 땅에 엎드리게 되었다.
☞성도는 계시록3:18의 말씀처럼 “안약을 눈에 사서 발라 보는자”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주 앞에서 얼마나 누추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발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②땅에 엎드러지는 사울
주님의 빛 앞에서 그대로 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이 그 빛에 의해 노출되기 때문이다.
③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님은 왜 성도들을 핍박하느냐?,
왜 교회를 핍박하느냐?,
왜 내 제자들을 핍박하느냐? 가 아니다.
⇨ “왜 나를 핍박하느냐?”이다.
※여기서 교회의 개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교회의 머리는 주님, 교회는 그의 몸, 성도들의 그의 지체다.
사울은 지금까지 몸된 교회와 지체들인 성도들을 핍박해 왔다. 그것은 곧 주님을 핍박하는 것
Ex)손가락을 아프게 하는 것은 곧 나 전체를 아프게 하는 것
발가락을 아프게 하는 것은 곧 나 전체를 아프게 하는 것
즉 그 한 지체의 아픔이 내 머리에 전달이 되듯이 이 지상의 교회에, 성도들에게 가하는
모든 아픔이 하늘의 주님에게 전달되고 그것이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④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주님은 그 빛의 실체가 누군지 분명히 밝히고 있다.
행전26:14에서 같은 사건을 조금 다르게 말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가시채로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고 한다.
이것은 고집 센 황소가 주인이 뒤에서 가시채를 가지고 자꾸자꾸 때리는데도 황소는 그것이 싫다고 뒷발질만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주인은 쎄게 황소를 때릴 것이다.
⑤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이 말은 앞의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말과 대조 되는 말이다.
앞에서는 혼자 날뛰고 있는 모습이지만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지 않으면 걸을 수 없는 소경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을 잡기 위해 들어가던 그가 오히려 예수에 의해 잡혀서 들어가는 자가 됨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게 됨
눈을 부릅뜨고 예수쟁이들을 찾아야 할 그가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사흘 동안 그는 기도를 하는 중이었다.⇨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되었다.
지금까지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살아오고 행동해 왔지만 이제 자기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를 궁극적으로 주관하고 있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 이제 그는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다.
그의 눈의 어둡게 하신 분이 주님이시니까 그의 눈을 밝게 할 수 있는 분도 주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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