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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가 배경(94):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빌립보서 3:7~9

작시:뤼 밀러(Mrs R. F. Miller);별로 알려진 것이 없음

작곡:죠지 베버리 쉬(G. B. Shea)(바리톤 가수)(1909~

1.작시자 뤼 밀러

○ 시카코 나사렛 감리교회 뤼 밀러 목사의 부인이었던 사람

이 시를 작곡자의 어머니에게 줌

2.이 시와 작곡자 죠지 베버리 쉬의 어머니

○죠지 베버리 쉬의 어머니는 이 시를 적은 노트를 가지고 10년이나 애송 해 오던 애송자였다.

그런데 죠지의 어머니가 그 노트를 잃어 버렸다.

그 시가 그녀에게는 신앙 간증과 같았고, 어려움을 이기게 하는 좋은 가사였다.

그래서 그것을 찾으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있다가

우연히 집을 정리하다가 그 시를 다시 찾게 되었다.

3.작곡자 죠지 베버리 쉬

목사의 아들

1928년(1929년 미국 대 공황) 미국 대 공황이 다가오는 가운데 경제의 침체, 기업들의 도산

실업자들이 속출되던 상태

이 시기 학턴대학(Houghton College)에 다니던 죠지에게 아버지의 편지가 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어머니와 나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해 왔고 우리가 아는 방법이란 모두 생각해 보았으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가을 학기에 너를 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질 않는구나, 나도 알다시피 요즘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한 1년 쯤 직장을 잡아 일을 해서 돈을 모아 다시 학업을 계속해야 될 것 같다. 이 일에 관해 뉴욕에 있는 뉴욕 상호보험회사 의무부의 주사로 있는 내 친구 해롤드 비즈(Harold Vaege)씨에게 이야기 하였던 바 그의 사무실에서 같이 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 죠지는 아버지의 제안대로 뉴욕 상호 보험회사에서 근무하게 됨

○ 그러던 중 우연히 NBC 라디오 방송국 편성부장 프레드 알렌(Fred Allen)을 알게 되었고

죠지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알게 되어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22살 때)

1,500명의 방청객과 전국 청취자들이 듣는 가운데 「모세여 내려 가오」라는 찬송을 불렀다.

그런데 이것이 상상외의 호응을 얻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계속 라디오 출연을 제의 받게 되었다.

(☞ 당시는 대 공항을 앞두고 대량 실직 상태가 오고 있는 상태에서 절호의 기회였다.)

○죠지는 희망에 부풀었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그 어머니가 이 시를 보여 주며 읽게 했다.

⇨ 어머니의 걱정은 아들이 저속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세상적으로 출세를 했을 때의 위험을 내다보고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신앙의 바탕이 없이 명예나 인기가 상승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죠지도 이 문제를 놓고 기도를 했다.

그러던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서 부를 찬송을 연습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준 시가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이 찬송을 치고 있었다.

이 찬송을 듣고 부엌에 있던 어머니가 달려와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날 주일 교회에서 처음으로 이 복음성가를 불렀다.

○ 수일 후 NBC 라디오 편성 부장을 만나서 방송국 출연을 거부했고

그 뒤 1947년부터는 빌리 그레함 목사와 함께 하면서 성가 가수로 활동하였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제롬 하인즈(Jerome Hines)라는 미국인 오페라 가수 지망생이 있었다.

  그는 피나는 노력과 연습 끝에 더디어 뉴욕 메트로폴리탄의 오페라 가수가될 수 있었다.

  

그는 오페라 공연이 없는 어느 날 공허한 가슴을 달래면서

  텔레비전 앞에서 채널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있었다.

  마침 미국의 최고 복음전도자 빌리 그레이엄목사님의 전도설교 시간이 되어

  설교 전 죠지 베버리 쉐아(George Bevery Shea)의 영감어린 바리톤 음성이들려오기 시작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이 찬양이 울려 퍼지는 순간

  제롬 하인즈는 성령의 은혜에 감전되면서 놀라운 감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도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되리라, 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지만 평상심을 회복하여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하면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았다.

  그렇게 하여 오페라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지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더디어 그렇게도 소원하던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택함을 받는 영광을 차지

 

하게 됩니다.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대본을 받아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처음 서곡에서 주인공의 춤이 나오는데 대본과는 달리 거의 나체나

  진배없는 모습으로 춤을 추도록 요구하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노랫말의 대본을 고쳐서 우리 입에 담기에 저질스러운 욕설까지 내뱉게 했다.

  그는 신앙 양심상 마음에 걸려 제작진에게 항의를 시도해보기도 했으나

  현대인들에게 어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제롬은 자신의 뜻이 반영되지 않고 거부당하게 되자 노래 부르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계약 파기에 따른 막대한 위약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페라 가수 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새로운

  찬양사역자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간증 집에 의하면 그가 오페라단 사무실에 사표를 내고 나오는 순간,

  그 기쁨이야말로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느꼈던 것 중에 가장 커다란 기쁨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해가 저물어가는 뉴욕의 밤거리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자신에게 그렇게도 쇼킹한 감동을 주어 자신을 매료시키며 변화시켰던

  조지 베버리 쉐아가 불렸던 찬양“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밤하늘

  을 향하여 영감 있게 부르기 시작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빌리 그래함 부흥회’에 일생을 바친 작곡가 죠지 쉐아(George B. Shea)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을 중단하고 있던 때에, 라디오 출연 교섭이 들어왔다.

 그는 ‘부귀' 와‘명성’이 따르는 가수의 길을 앞두고 갈등했으나, 어머니가

  보여주신 이‘찬송시’를 생각하며 복음성가 가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찬송시'를 근거로 1925년 죠지 쉬어의 부인 뤼이 밀러(Rhea F. Miller)

  가 작사했고, 1929년 죠지 쉬어가‘빌리 그래함 부흥회’즉석에서 작곡하였고,

  그‘빌리 그래함 부흥회’에서 처음 불려진 뒤 전세계적으로 애창되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102장은 G.B. Shea라는 분이 작곡한 것입니다. 그는 어렸을 때 예수를 믿었습니다.

교회학교에도 열심히 나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출세하고 돈을 벌면서 점점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예수님이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시카고방송국의 연출가였고, 인기 절정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돈은 많이 벌면서도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출세를 하면서도 마음속에서 불안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갑자기 어릴 때 믿던 예수님에 관한 추억과 향수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낭비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어느 성회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예수님께 대한 헌신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방송국에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다시 전속계약을 하면 지금까지보다 몇 갑절의 출연료를 주겠다는 내용의 전화였습니다. G.B. Shea는 "

나는 이제부터 내 모든 재능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쓰기로 작정했습니다."라고 하며 방송국의 계약 청원을 거절했습니다.

그때부터 G.B. Shea의 마음속에서 멜러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그녀의 친구인 밀러 여사에게서 가져왔던 시에 작곡을 했습니다.

"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내 모든 것을 다 버리고서라도 소유해야만 하는 보물이 있습니다. 그 보물이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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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가 배경(86장):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

  이 찬송을 작시 작곡한 빌혼(Bilhorn Pater Phipip)이 어느 날 시카고의 한 주점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그의 노래를 듣던 한 사람이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에 감탄하여 그 재능을 주님의 사업을 위해 사용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빌혼을 무디 목사의 부흥 집회에 초청하였다.

 

  그날 밤 은혜를 받은 빌혼은 12일 간이나 계속되는 부흥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했고, 그 후 마차 바퀴를 제조하는 사업을 모두 형에게 맡기고 복음 전도 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전도를 위해 대도시나 소도시 험한 오지 등을 가리지 않고 다니다 보니 가장 큰 애로 사항은 악기의 운반이었다.

  기계공업이 전공이었던 빌혼은 어디든지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가벼운 올갠을 고안하였다.

  그는 이 악기가 순회 전도자 군대 등에 많이 사용되어 인기를 얻자 제조회사를 설립했고, 이 회사는 크게 번창하여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은 모두 복음 전도 사업에 사용하였다.

  이런 삶의 과정에서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빌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나의 친구로 항상 함께하심을 깨닫고 1896년 40세 되던 해에 이 찬송을 작시, 작곡하였다.

  빌혼은 1900년 영국 크리스탈 팔레스에서 열린 세계 기독교 대회에서 4,000명으로 구성된 대 성가대를 지휘했고 빅토리아 여왕의 초대로 버킹검 궁의 예배에서 특송을 부르는 명예도 누렸다.

  1936년 12월 13일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에서 75세로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000여곡을 작시 작곡하였으며 굴지의 풍금 회사와 1,400여 편이 넘는 복음성가의 판권을 가지고 있었다.

작사 ・ 작곡자인 피터 빌혼(Peter Philip Bilhorn, 1865-1936)의 성은 본래 풀혼(Pulhorn)이었는데, 일리노이주 오타와 법원의 아브라함 링컨이라는 판사의 판결로 빌혼이란 성을 갖게 되었다. 빌혼은 처음 형제들과 함께 마차 제조업을 하였다. 1883년 무디 목사네 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서 주님을 영접하였다. 타고난 아름다운 목소리에 창의력까지 갖춘 그는, 조지 루트와 조지 스테빈스에게서 음악을 공부하고, 무디 목사에 의해 복음찬송 작곡가와 찬양자로 발탁되어 빌리선데이 목사의 부흥회에서 찬양을 하였다. 평생 2천 여 편의 아름답고 은혜스러운 찬송을 작사・작곡하였다. 그는 집회 때마다 대형 오르간을 이동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휴대용 오르간을 연구 개발하여 시카고에「빌혼 휴대용 오르간 회사」(Bilhorn Folding Organ Company)를 만들어 큰돈을 벌어 선교사업에 헌금하였다. 이 오르간은 지금도 세계 각처 미군부대 채플에서 애용되고 있다.

  1962년에 내가 난생 처음으로 산 오르간도 미 8군에서 흘러나온 이 야전용 오르간이었다. 모양은 허름해도 피리가 야마하 오르간(山葉, Yamaha Organ) 보다 음질이 고왔고, 더군다나 쌍피리라서 음색이 화려하였다.

  빌혼의 전성기에는 1900년으로서 영국에 가서 수정궁전(Crystal Palace)에서 4천명의 찬양대를 지휘하였고,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버킹엄 궁전에 초대하여 찬양을 하게 하였다. 그가 작사・작곡한 찬송 중 우리 찬송가에 채택된 것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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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송가 배경(28): 복의 근원 강림하사
                                                                    

사무엘상 7:10~12

작사: Robinson Robert 1735ㅡ1790

작곡: Wyeth John 1770ㅡ1858

 

로빈슨 로버트는 영국의 목사

8세때 부친을 잃고 가난하게 살아가다가 14세에 이발소 견습생이 되었다.

그 후 18세 때에는 자립하여 이발소를 하나 차릴 만큼 되었지만

불량한 청년들과 어울려서 무절제한 방탕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날도 역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실컷 마신 후 뒷골목을 휩쓸고 다니다가

한 점쟁이와 마주 쳤다.

그 점쟁이가 로빈슨을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자네는 자식과 손자를 볼 만큼 오래 살겠군”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그 말이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로빈슨의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내가 자식과 손자를 볼 때까지 살다니 그렇다면 내 생활을 바꿔야겠다.

이런 식으로는 오래 살지 못할 거야 ”

그렇게 생각한 로빈슨은 그 길로 당시 부흥 목사였던 죠지 윗필드 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로빈슨은 오랜 방황에서 돌이켜 회심하였다.

그리고 독학으로 공부하여 영국 노포크(Norfolk) 교회에 목사가 되었다.

1758년 어느 날 로빈슨은 목사관 서재에서

성령 강림 주일을 맞아 설교를 준비하다가 말할 수 없는 감회의 젖어 들었다.

장래를 알 수 없었던 암담한 생활을 하던 자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는 한없이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이 찬송시를 지었던 것이다.

1절에서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쳐 달라는 기도와

2절에서 크신 도움 받아 이때까지 왔다는 고백과

3절에서 주의 은혜가 사슬이 된다는 표현은 매우 아름다운 가사다.

원 가사에는 사무엘상7장 12절의 “에벤에셀”이란 표현이 있었으나

그것이 현대의 성도들에게 쉽게 전달되지 않아

한 편집자의 요청으로 마가렛 클랙슨 양이 성경의 암시를 잘 살려 표현했다고 한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뜻이다

우리는 참으로 연약하나 주는 그 연약함을 친히 대신하셨다.

마 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는 우리를 이렇게 도우시는 주 앞에 이 찬송을 힘써 불러야 할 것이다.

작곡은 미국의 예이드가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성가집 Wyeth's Repository of Sacred Music(1813)에 있는 Nettleton이란 곡에 붙였다.

이곡에 따라 부르는 우리 찬송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383)

옛 찬송가의 「지금까지 지내 온 것」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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